등록날짜 [ 2011-11-22 15:54:26 ]
오십 대까지 악착같이 번 재물, 한순간에 다 잃고 나니
몸은 병들고 마음은 지쳤으나 예수 만난 후 기쁨 넘쳐
유성심 성도 (16교구 2지역)
주일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장애인 콜센터에 전화를 한다. 2시간 전에 예약해야 콜택시를 이용할 수 있어서다. 9시쯤 집 앞에 도착한 택시를 타면 기사님이 조심스레 질문한다. “왜 그렇게 먼 교회에 다니세요? 그냥 가까운 교회 다니시지….”
노원구 하계동에서 구로구 궁동 연세중앙교회까지는 차로 한 시간 반 거리다. 걸음도 제대로 못 걸어서 콜택시를 이용하는 장애인이 멀리 떨어진 교회에 가느라고 부산떠는 모습이 이상한 모양이다. 매주 기사가 바뀌다 보니 늘 반복해서 듣는 말이라 할 말을 미리 준비해두었다.
“기사님, 연애해보셨죠? 연애할 때 애인이 아무리 멀리 있어도 어떻게 해서든 가서 만나고 싶잖아요. 저는 지금 연애하는 기분이에요.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 들을 때,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니까 한 시간 반 거리가 조금도 멀지 않아요. 지금 저는 애인 만나러 가는 거예요.”
그러면 기사님들은 “아~ 그 교회가 그렇게 말씀이 좋아요?”라고 하면서 수긍이 가는 표정을 짓고는 다음에 자기도 한번 가보겠다고 말한다.
올해 57세인 나는 2급 장애인이다. 류머티즘 때문이다. 28살 때부터 앓았으니까 30년 가까이 급성류머티즘을 달고 살고 있다. 열 손가락과 열 발가락이 하나같이 틀어질 대로 틀어졌다. 한쪽 무릎에 골수염이 와서 수술한 후부터 양다리 무릎과 고관절까지 다 인공관절 수술을 받았다. 그래서 무엇 하나 내 힘으로 할 수 없지만 나는 지금 행복하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고백도 주님을 만났을 때 했다.
병든 몸으로 수십억 재산을 모았으나
한때는 동대문 시장 의류상가에서 수십억대 돈을 벌어 남부럽지 않게 살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류머티즘을 앓으면서도 이십 대 초반부터 화장품 판매원, 파출부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삼십 대 초반에 동대문에서 옷 장사하는 언니 집에서 일하면서 장사를 배웠다. 내가 장사한 날은 매상이 아주 좋았다. 정말 나는 장사에는 타고난 재주가 있는 듯했다.
몇 년간 모은 월급에다 전세금을 빼서 보태 자그마하게 내 옷 가게를 차렸다. 어찌나 불티나게 장사가 잘되는지 하루 매상 1000~2000만 원 올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돈 버는 재미에 빠져 하루 3~4시간 자고 장사했다. 그렇게 돈 버는 데 몰두하는 동안 손가락에 이어 발가락까지 모두 변형이 돼서 걸음도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아스피린을 하루에 15알씩 먹으면서도 장사는 악착같이 했다. 번듯한 가게도 차리고 옷 공장도 운영해서 수십억대 재산을 모았다.
그런데 15년 동안 병든 몸으로 잠도 못 자가며 피땀 흘려 번 돈이 하루아침에 다 날아갔다. IMF 때문이었다. 거래처에서 받은 수표가 부도처리가 되고 사업은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거기서 멈췄으면 좋았을 텐데 가게와 집까지 팔아서 다시 투자하려다가 아예 망하고 말았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직전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
화(禍)는 혼자 오지 않는다더니, 남편마저 병든 나를 떠나고 말았다. 점을 쳤더니 내가 신을 받아야 할 팔자라고 했다. 내가 받지 않으면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신기가 내려간다는 말에 덜컥 겁이 났다. 친정 동생이 신기 때문에 정신병원 신세를 30년이 넘게 지고 있는 가슴 아픈 내력이 있기에 아들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내가 감당할 작정으로 신 내림굿을 하고 법당까지 차렸다. 그런데 군에 간 아들이 말년휴가를 와서 보더니 그 자리에서 한참 기도하더니 “어머니,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하면서 그것들을 깨끗이 치워주었다. 내심 속이 시원했다. 아들은 군대에서 하나님을 뜨겁게 믿고 있었다. 제대한 아들을 따라 나도 하나님을 믿게 됐다.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난 체험을 한 건 2004년이다. 50살 때였는데 양쪽 무릎을 인공관절로 바꾼 지 몇 년 되지 않아 고관절까지 인공으로 갈아 끼우는 수술을 할 무렵이었다. 수술비용이 5~6백만 원이 넘어가는데 오른쪽에 이어 왼쪽다리도 수술해야할 시점에는 정말 막막했다. 몸이 병든 것도 서러운데 수술비가 마련되지 않았으니 절박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수술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오니 병실에 누워 할 일이 기도밖에 없었다.
아들이 눈물로 간절히 기도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나도 열흘간 매일 2시간씩 간절히 눈물로 기도했다. 그런데 수술실에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눈을 감았는데 놀랍게도 예수님이 보였다. 깜짝 놀라 눈을 떴는데도 여전히 예수님이 침상에 앉아계셨다. 예수님께서 잔잔히 미소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너무나 기뻤다. 예수님이 나를 찾아오시다니!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니 수술실로 실려 들어가면서도 아무런 근심 걱정이 들지 않았다.
모든 걸 예수님께서 책임져주시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정말 수술결과는 무척 좋았고, 수술비도 여러 군데서 지원해주어 완전히 해결됐다. 그 무엇보다 정말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그 주님이 병들어 삶에 지치고 외로운 나를 찾아주셨다는 것이 말할 수 없이 좋았다.
연세중앙교회에서 다시 시작하는 신앙생활
그렇게 예수님을 만난 후 CBS TV를 시청하다가 찬양과 기도와 설교 말씀이 내 열정의 강도와 딱 맞는 뜨거운 교회를 알게 됐다. 그래서 1년 동안 CBS TV로만 사모하며 예배드리다가 2009년 10월 드디어 용기를 내어 불편한 몸으로 전철과 버스를 타고 1시간 반 떨어진 곳에 있는 그 교회에 직접 찾아가서 예배를 드렸다. 바로 연세중앙교회다.
사실 양쪽다리의 무릎과 고관절이 다 인공이라 걸음을 떼기 어렵고 힘들지만,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교회를 오가는 동안 3시간이 넘는 시간이 단 1분도 힘들다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지난해 5월 금요철야예배를 드리고 집에 가다가 버스 안에서 넘어지는 사고가 나서 입원했고, 다 나아갈 무렵엔 패혈증이 덮쳤다. 큰 병원으로 이동하는 중에 심장이 멎었으나 심폐소생술로 호흡 줄을 찾았다가 이내 깊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무균실에서 열흘이 지나도록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자 의사가 임종을 예고했다. 하지만 아들이 휴가 내서 열흘 동안이나 중환자 대기실을 지키며 기도해주고, 교회 직분자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와 기도해주어 기적적으로 25일 만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것이다.
패혈증은 건강한 성인 남자라도 치사율이 높은 무서운 병인데 병약해서 곧 죽을 것 같은 몸으로 살아난 것도, 수천만 원이 넘는 병원비가 많은 분의 사랑으로 해결된 것도 모두 기적 중의 기적이다. 또 한 번 주님께서 기도하는 분들을 통해서 나를 얼마나 사랑해주시는가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아프고, 그렇게 수술하고, 그렇게 환경도 열악한데도 어쩜 그렇게 표정이 밝아요?”
요즘 많이 듣는 인사말이다. 내겐 세상에 자랑할 만한 돈, 건강, 학식 그 무엇도 없지만, 그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따스한 주님의 사랑이 항상 내 삶 속에 잔잔히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가슴 뻥 뚫리도록 마음껏 주님을 찬양하고, 내 사정을 눈물로 아뢰며 간절히 기도하고, 설교 말씀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연세중앙교회로 사모하는 애인을 만나는 심정으로 향한다.
위 글은 교회신문 <266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