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3-02-13 10:26:34 ]
북한 감옥에서 13년 동안 지내며 용케 살아남아
중국으로 탈출한 뒤 목회자 사모 만나 남한으로
현재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행복 누리며 살아
<사진설명> 북한에서의 삶은 그 자체가 마치 감옥과도 같았다. 사진은 영화 ‘크로싱’의 한 장면.
김바울(가명)
1963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6·25전쟁 당시 소련군사 고문들을 통역해 주는 소좌(소령)였는데, 그 후 조선체육지도위원장으로 계시다가 김정일의 지시로 ‘곁가지 치기 운동(출신 성분이 안 좋은 가족들을 추방하는 운동)’이 일어나 평양에서 추방당할 위기에 처했다. 외할아버지가 공산당을 반대하는 ‘멸공단’ 책임자로 총살당한 처단자 가족이라는 이유였다.
노동당에서는 그런 어머니와 이혼하면 된다고 하여 자식들 때문에 합의이혼을 하였고,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추방당한 어머니는 평안북도 동림 탄광 식모로 계시다 1년 만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노동당에서는 출세와 명예 때문에 자기 아내까지 버렸다면서 아버지와 남은 가족들을 청진으로 추방했다. 그때 나는 군 제대를 앞두고 평양 시내에 외출하였다가 약국 진열장 안의 녹용을 훔치다 발각되어 1년을 감옥살이하다 나왔다. 주소만 들고 청진으로 가는 길에 목욕탕에 갔다가 남의 옷을 훔쳐 입고 나왔는데, 몸은 뼈에 가죽만 남고 염치도 없어 집에 가지 못하고 제철소 근처에서 자다가 노동자의 신고로 경찰서에 끌려갔다.
고문 끝에 옷을 훔친 사실을 자백하니 집 근처도 가지 못하고 재범자로 2년짜리 돌막산이라는 악명 높은 감옥에 갔다. 그 감옥은 지난 감옥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생지옥이었다. 2000명 정도 수용시설에 5000명 이상이 있었으며, 죽어 나가는 시체가 일주일에도 70~80명이나 되었다. 20평도 안 되는 방에 100명 이상이 칼잠을 자고 밤새 사람이 수도 없이 죽었다.
겨울에는 땅이 얼어 묻지 못한 시체가 6미터 담장 높이까지 쌓여서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낮에는 맷돌과 비석 만드는 일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노천에서 쉬지 않고 했다. 강냉이밥에 썩은 시래깃국을 먹으며 살면서도 죽지 않은 것이 지금 생각해 보니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결국 13년 만에 청진 집에 도착하니 나를 처음 보는 매형이 “장인어른 형님 되는 분이냐?”고 묻는 말에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지은 죄의 대가가 현재 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6개월간 몸을 추스른 후 제철소에서 일을 시작하고 결혼도 했다. 그런데 아내가 내가 감옥에 갔다 온 일을 알게 되자 생후 20일밖에 안 된 아들을 버리고 첫사랑을 찾아 떠나가서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배급도 6개월간 안 되고 제철소는 코크스 연료가 없어 가동을 중지한 상태였다.
아이라도 먹여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트럭에 싣고 가는 꿩을 훔쳤는데, 하필 그 꿩은 김정일이 자기 생일을 맞아 직접 사냥한 것으로 도당 간수들에게 보내려던 것이라 잡히면 무조건 총살형이었다. 조사받던 경찰서에서 죽을힘을 다해 도망가 사흘 동안 주야로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두만강을 넘었고, 4개월을 중국의 화룡, 연길, 심양, 위해 등을 전전하며 살아남으려고 온갖 고생을 했다.
특히 두만강에서 넘어서 빈집에 들어가 자다가 한족들에게 붙잡혀 죽을 지경으로 맞았다. 겨우 도망쳐 십자가를 보고 병원인 줄 알고 들어갔더니 조선족 주인 여자가 쌀밥에 고깃국을 주는데 어찌나 감사한지 눈물을 흘리며 먹고 나니 따뜻한 방에 재워 주었다.
자고 있는데 사람들이 몇 명 오더니 같이 예배를 드리자며 나를 데리고 처음으로 예배를 드렸는데 알고 보니 그 주인 여자가 목사 사모였다. 그 사모는 하나님을 모른다는 내게 무조건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따라 하라고 했다. 그리고 눈물로 “하나님, 이 아들을 받아 주시니 감사합니다”라며 기도해주었다. 또 “성령님께서 지금 이 곡을 당신에게 불러 주라고 했다”면서 찬송가 341장(너 하나님께 이끌리어)을 불러주는데, 뭔 뜻인지 몰라도 마음이 슬펐다. 그 후 사모에게 차비를 얻어 연길까지 가는데 그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신분증 검사를 무사히 벗어났고, 남의 집 굴뚝 수리, 담장 수리, 돼지 키우기 등을 하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내기를 도와주던 주인집 아줌마가 준 라디오에서 우연히 극동방송을 듣고는 특히 여자 아나운서 목소리가 천사 소리처럼 느껴져 남한에 가기로 결심했다. 남한으로 가는 길도 천인호 여객선을 몰래 타고 오는데, 하늘에서 소나기를 쏟아 주시고, 공산당원 보초의 눈을 가려 주신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다. 나중에 남한 어느 교회에서 또다시 찬송가 341장을 들을 때 중국 작은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나며 그때 하나님이 나를 보시고 지금까지 살려 주셨다는 생각에 감사가 넘쳐 나왔다.
탈출한 지 5년 만에 가족 소식을 알아보려고 중국에 가서 누이동생을 만났다. 내가 남한으로 도망한 후 아버지와 형님 가족은 수용소로 끌려갔고, 20일밖에 안 된 내 아들은 굶어 죽었다고 했다. 이 비통한 소식을 듣고 남한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살 소망도 잃은 채 오열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내면 깊은 곳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사랑하고 돕고자 하는 네 부모·형제는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이니 너는 이제 남쪽에 있는 형제들을 네 부모·형제처럼 사랑하고 도우며 살라.’ 그 소리에 감격하여 울고 또 울었다. 그 순간 내 어깨와 온몸을 누르고 죽음으로 몰아가던 그 무엇인가가 사라지고, 몸이 가벼워지며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였다. 그때 그 음성이 오늘날까지도 나를 버리지 않고 변함없는 사랑과 생명의 빛으로 인도하고 계신다.
북한에서는 도적질하지 못하면 잠을 못 자던 내가 이제는 돈이나 재물만 생기면 누구를 주지 못해서 잠이 안 오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또 이 땅에서 천국 사람같이 살지 못하면서 천국 가겠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도둑놈 심보라는 생각이 들어 ‘어떻게 하면 사랑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더 많이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 하고 늘 생각하며 살고 있다.
누군가는 탈북자를 ‘변절자’라 하였지만,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양떼를 하나하나 불러들이는 것이 아닐까. 나는 하나님께서 불러 주신 탈북자들에게는 북녘땅을 향한 소명을 주셨다고 확신한다. 연세중앙교회에서 생명 말씀의 씨를 받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잘 자라 탈북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며, 그들을 전도하고, 믿음으로 세우는 일에 내 생명을 다 바치고 싶다.
위 글은 교회신문 <325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