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인 수기] 암흑과 같던 북한 생활에 환멸 느껴

등록날짜 [ 2013-02-26 09:32:21 ]

김일성 사망 후 그나마 나오던 배급도 아예 없어져
나라에 충성을 다해도 결국 돌아오는 건 굶주림뿐
결국 가족을 위해 중국으로 탈북을 시도하는데…

함경북도에서 삼 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 품에서 먹을 걱정 없이 살았다. 7세에 유치원에 입학했는데, 유치원에 가면 김일성 초상화에 정중히 인사부터 하고 밥을 먹을 때도 “김일성 원수님, 고맙습니다” 하고 먹었다. 집에 와서도 김일성 초상화에 인사를 먼저 하고, 먼지가 묻을세라 매일 초상화를 닦고 또 닦았다. 인민반장이 초상화 검열하러 올 때 먼지가 묻어 있으면 큰일이 나기 때문이었다.

김일성이나 김정일 생일이면 사탕, 과자, 교복을 무상으로 주고, 평소에 먹어 보지 못하던 돼지고기도 그 날만은 먹을 수 있기에 그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가 받으면 정말 감사했다. 이런 생활을 하다 보니 우리가 먹고사는 모든 것이 김일성 덕분인 줄 알고 살았다.

학교 교육은 유치원 1년 후 인민학교 4년, 고등중학교 6년을 의무교육을 받는데, 국어, 수학, 자연, 역사, 한문 등과 김일성 혁명역사를 배웠다.

학교에서 남조선은 자본주의 나라이기에 학교 가는 것도 돈을 내야 하고, 너무 가난하고 먹을 것이 없어서 거지가 많으며 시위, 투쟁이 많은 몹시 나쁜 나라라고 배웠다. 또 미국 양코배기 선교사가 자기 밭에 떨어진 사과를 아이가 주웠다고 그 아이 이마에 청강수(염산)로 ‘도적’이라 썼는데, 얼마나 센 약인지 이마가 타들어 갔다고 배웠다. 그래서 선교사가 뭔지도 몰랐지만 그 이미지가 아주 나빴다. 그런 나쁜 미국 놈들이 남조선에 둥지를 틀고 앉아서 북조선까지 삼켜 자기들의 노예로 삼으려 한다는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학교생활은 오전에는 공부하고 오후에는 농촌으로 지원을 가서 힘든 농사일을 해야 하는데 모내기 때는 공부를 아예 전폐하고 농장마을에 가서 살면서 일을 해야 했다. 게다가 담임은 툭하면 학생들을 때리고 함부로 하여 졸업을 앞두게 되니 앓던 이를 뽑은 것처럼 시원하였다.

나는 공부를 잘하는 편이라 대학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졸업 즈음에 영양부족으로 병에 걸려 손등과 발등 껍질이 벗겨지고 기운이 없어 학교에 못 가다 보니 대학 시험도 못 쳤다. 졸업 후에는 대학 시험에 합격한 학생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부모를 둔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학교에서 지겹게 일하던 협동농장으로 배치를 받았다. 하지만 몸이 아프던 나는 아는 사람의 소개로 오리공장에 취직했다. 그때까지는 배급도 주고 많지는 않았지만, 월급도 어김없이 받았기에 열심히 일했다.

북한은 전국적으로 중학교 졸업 후에는 일 년에 한 번 보름간 노동적위대 훈련을 한다. 나중에는 눈 감고도 무기 분리를 할 정도로 총을 잘 다루고 제법 잘 쏘게 된다. 그렇게 해야만 나라를 지킬 수 있고 남조선에 있는 미국 놈들도 때려 부수고 이겨서 남북이 공산주의로 통일된다고 하였다.

어느 날, 적위대훈련을 하느라 집을 떠나서 먼 곳에 가서 먹고 자며 생활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버지께서 사망하셨다는 소식이 왔다. 집에 가 보니 아버지는 이미 관 속에 누워 계셨다. 큰 폭파 사고를 막으려고 자신을 희생하신 사고사였다. 그런데 당과 수령을 위해 목숨을 바쳤건만 그에 대한 아무런 대가가 없었다. 50세도 되지 않은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죽은 것도 충격이었지만, 당과 수령을 위해 산다는 것이 허무했고, 당에 대한 충성심이 그때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1994년 7월, 영원히 죽지 않을 것 같던 김일성이 죽고 나서부터 나라에서는 매달 주던 배급을 두 달에 한 번, 몇 달에 한 번 공급하더니 아예 없어졌다. 배급도, 월급도 안 주면서 직장에 출근하라고 하니 참 답답한 노릇이었다.

어떻게든 먹고살려고 대부분 장마당에서 알곡 장사를 했는데, 나도 강냉이 장사를 했다. 강냉이 살 돈을 꿔서 농촌에 가서 강냉이를 조금 싼 값에 사서 장마당에 가져와 좀 붙여서 파는 장사였다. 배낭으로 운반해야 하는데 너무 힘들었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기차는 가다가 정전되면 한 정거장에서 몇 시간, 때로는 며칠을 서 있었다. 그럴 때면 배가 고파서 배낭에 든 생강냉이를 꺼내서 막 씹어 먹어야 했다. 그렇게 힘들게 강냉이 장사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장마당에서 계속 보던 20대 처녀애가 보지 않았다. 기차 타고 어디 강냉이 사러 갔나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가난이 극심한 탓에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사람고기 장수에게 희생물이 된 것이다. 우리 동네에서 얼마 멀지 않은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강냉이 장사를 하던 50대 부부가 장마당에 가서 20대 미만인 처녀들에게 접근하여 자기 집에 가면 강냉이를 싼값으로 주겠다며 같이 가자고 꾀어서 데리고 가서는 죽이고 그 시신을 각 떠서 국을 끓여 먹고 반찬도 해 먹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배고파서 시작한 것이 나중에는 사람고기 장사가 되었는데, 고기를 토막 내서 국 끓여 팔면 많은 사람이 사 먹었고, 한번 먹은 사람들은 하도 맛있어서 단골손님이 됐다고 했다. 그 부부를 인민의 이름으로 공개 총살했다. 천으로 눈을 가리고 총을 쐈는데 그 몸에서 붉은 피가 펑펑 쏟아졌다. 하지만 인민학교 때부터 총살하는 것을 자주 봤기에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경제 사정이 더 나빠져서 정상으로 돌던 공장들이 하나둘 문을 닫더니 나중엔 거의 모든 공장이 문을 닫았다. 결국 다니던 오리공장을 그만두고 입에 풀칠하려고 국수장사를 시작했다. 국수 10킬로그램을 팔면 1킬로그램 혹은 500그램 정도 벌 수 있다. 그걸 나만 먹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동생 둘까지 먹여야 했으니 턱없이 모자랐다. 당시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큰 충격을 받아서 중풍이 들어 오른쪽을 쓰지 못하여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다.
겨울에는 석탄을 때야 하는데 너무 비싸서 볏짚이나 강냉이 대를 주워서 땠다. 저녁에는 전등이 있어도 정전이 되어 날만 어두우면 누워 있었다. 정전이 안 돼도 못 먹어서 앉아 있을 힘도 없었다.

북한 땅은 암흑 땅이고, 코앞에 있는 중국 땅은 불빛이 반짝반짝 밤새 꺼지지 않고 자동차가 씽씽 다니니 무척 부러웠다. ‘같은 땅인데 이럴 수 있나?’ 하며 북한 땅에 태어난 것을 원망했다. 또 동생들은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하고 중퇴했다. 어머니와 동생들을 보면, 내가 못 해 줘서 굶고 있다는 죄책감에 시달려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살까 고민하던 어느 날, 사촌오빠가 집에 찾아와서 중국에 가서 돈을 벌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처음에는 두려워 고민하다 어머니가 승낙하지 않으실 것 같아 말도 하지 않고 한 달만 다녀오기로 생각하고 내 친구하고 사촌오빠 이렇게 셋이서 두만강을 넘었다.

북한에서 모진 고통 속에 사느니 차라리 중국에 가서 이밥이라도 배불리 먹고 죽으면 소원이 없겠다 싶었다. 중국으로 가다가 두만강에서 혹시 일이 잘못되어 죽는 한이 있어도 떠나 보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다.

저녁 6시 30분, 두만강 초소군인이 저녁을 먹으러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겨울이라 물이 얼었기에 온 힘을 다해 중국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달빛에 우리가 뛰는 모습이 다 보일 것 같아 뒤에서 우리를 발견하고 총을 쏠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심장이 어찌나 뛰는지 심장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그렇게 죽지 않고 무사히 두만강을 건너 중국 땅에 도착했다.

사촌오빠는 그다음 날 다시 북한 자기 집으로 가 버렸는데 알고 보니 나와 내 친구를 돈을 받고 판 것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이연희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32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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