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인 수기] 영육 간 복 주신 주님 은혜 어찌 갚으리

등록날짜 [ 2013-04-23 10:41:55 ]

내키지 않는 남한행이었으나 그것이 나에게 큰 복일 줄이야
이 모든 것이 전부 어머니의 기도 덕분임을 나중에 깨달아
영원한 천국 소유하게 됐으니 이제 전도로 그 은혜 갚을 것

<지난 줄거리>
북한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노동당원이 되었다. 그러다 10여 년 만에 어머니와 연락이 닿아 중국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브로커를 따라나섰다. 그런데 낌새가 이상하여 물어보니 중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한국으로 가는 중이라 했다. 남조선에 있는 어머니가 나를 속여 한국으로 데려가는 것이라 들었다. 어머니와 다시 통화할 기회가 생기자 어머니께 마구 따졌다. “어머니 나 공산당원인데, 내가 어디를 가요. 다시 북한으로 돌아갈래요….”


<사진설명> 외국을 거쳐 한국 공항으로 입국한 탈북자들.

당시에는 북한이 어디라고 다시 돌아가겠다고 성을 냈는지, 제시간에 복귀하지 않아 노동당원으로서 안 좋은 꼬리표가 달릴 것만 생각해 안달이었다. 어머니는 어쩔 수 없다고 느꼈는지 브로커를 다시 바꿔 달라고 했다. 브로커는 한참을 이야기하더니 통화가 끝나자 전화기에서 칩을 빼서는 어디론가 던져 버렸다. 아마도 일이 잘되지 않을 때를 대비해 미리 손을 쓰는 듯했다.

나는 밥 먹는 것도 잊고 통곡하며 울어댔고 다른 사람들은 저녁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와 같이 온 사람들은 대부분 북한에서 직접 넘어온 사람들이었는데, 중국에서 2년을 살다 온 아이가 나한테 가만히 다가오더니 귓속말로 이야기했다.

“언니, 저 중국 사람들이 하는 소리를 가만히 들었는데, 저 사람들이 언니를 죽여서 어느 골짜기에 버리든지 팔아 먹겠다고 해요. 차라리 우리하고 같이 가요.”

가슴이 섬뜩하였다. 내가 이러다 이쪽저쪽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죽을 것만 같았다. 한참을 생각하다 드디어 결심하고 조선족 브로커에게 한국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다시 어머니께 알려야 하는데 이제는 전할 길이 없었다. 속상해할 어머니를 생각하며 또 울었다. 후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나와 전화 통화를 마치고 어머니는 그때부터 교회에 가서 강대상 앞에서 울며 금식 기도를 했다고 한다. 금식 기도한 지 나흘째 되는 날, 어머니는 한국 브로커에게 딸이 몽골 국경을 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한편, 우리 일행은 몽골 국경을 무사히 넘었으나 국경 경비대에 붙잡혀 탈북자들이 있는 수용소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거기서 이상한 사람들을 보았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노래도 하고, 누군가 앞에서 열심히 전하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였다.

한 달 이상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그들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고, 사람들을 모아놓고 앞에서 설교하던 남자는 나와 인연이 되어 후에 결혼했다. 우리가 부부가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일찍부터 계신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당시 하나님이 누구신지 전혀 알지 못했는데, 그때 남편은 자기가 읽던 어느 목사님의 책을 주며 읽기를 권했다. 수용소는 내가 먼저 나왔고, 후에 서울에서 다시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우여곡절 끝에, 아니 하나님 은혜로 한국 땅을 밟자 참으로 감회가 새로웠다.

나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한국에 온 이야기도 참으로 은혜가 넘친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북송된 후, 병세가 나빠질 대로 나빠진 상태였지만 살던 곳에 더는 머물 수 없어 정처 없이 길을 떠났는데, 어떤 할머니가 전도해서 교회에 처음 나갔다고 한다. 그 후 매일 교회에 다니며 하나님께 매달렸는데, 처음에는 기도가 뭔지도 몰랐단다. 그저 울면서 고통을 다 이야기하니 속이 후련했고,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십일조와 감사 헌금을 꼬박꼬박 내며 예배에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병세는 차도가 없었다. 매일 병원에 가야 했는데, 그 큰 비용을 교회에서 부담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한국에서 선교하러 오신 목사님이 어머니 사정을 듣고는 한국행을 알아봐 주겠다고 하셨다. 북송된 아버지가 오지 않아 선뜻 한국행을 결심할 수 없어 매일 기도하였더니 그 응답으로 아버지가 무사히 돌아와서 함께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고 했다.

어느새 나와 우리 가족이 한국에 온 지도 ○년째다. 한국에서 생활하다 보면, 아직도 북녘 어딘가에 묻혀 있을 동생 생각으로 마음이 아려온다. 막냇동생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내가 평양-남포 고속도로 건설장에서 노동에 참여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2001년이었다. 공민등록증을 새로 발급해야 했는데, 신청서에 있는 가족 관계에 무조건 다 사망이라고 적었다.

그러자 담당 안전원이 막냇동생은 사망이 맞지만, 부모님과 둘째 동생은 행방불명이라고 했다. 그래서 막냇동생이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고 물으니, 한국행을 시도하다 붙잡혔는데 연락할 가족이 없어 교도소에 겨우내 있었다 한다. 그리고 찬 감옥에 있다가 병을 얻어 죽기 직전이 되니, 살던 마을 근처 역전에 내려놓고 갔다고 한다. 가족도 없이 혼자 앓다가 죽었다는데, 시체라도 찾으려고 하니 그때 한창 다른 사람들이 무리로 죽어가던 때라 한꺼번에 묻어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하였다. 가족들의 생이별도 가슴 아픈데, 사랑하는 막냇동생은 꽃망울도 채 펴보지 못하고 한 많은 세상을 떠나 시체조차 찾을 수 없었다.

훗날 내가 한국에 와서 이 이야기를 부모님께 전해 드렸더니 어머니는 다 당신 탓이라고, 자신이 자식을 죽인 장본인이라고 자책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어찌 이런 고통과 불행이 우리 가족만 겪은 일이었겠는가. 대한민국에 넘어온 모든 탈북자 가정들, 아니 저 북한 땅의 모든 가정이 다 겪은 일이다.

언젠가 북한 선교를 하는 선교사님께 들은 바로는 북한 성도가 남한 성도를 두고 “남한 성도가 경제적인 풍요와 삶의 안락함 때문에 시험에 들지 않도록 보호해 주소서!” 하고 간절히 기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기도는 남한 성도들뿐만 아니라 우리 탈북자들에게도, 아니 나에게도 절실한 기도다.

내가 지금 누리는 이 풍요로운 삶에 도취해 받은 은혜를 다른 이에게 나눠주지 못한다면 주님 오시는 그때에 무슨 면목으로 주님을 뵈올 수 있으랴! 이 땅에서 오직 영혼의 때를 위하여 죽도록 충성하고 사랑하고 전도해서 하늘의 상급을 많이 쌓아 주님 오시는 그날 들림을 받고 하늘나라에 갈 신부의 믿음으로 살아가리라! 이것이 나의 영적 삶의 좌우명이며, 복음으로 통일되는 그날까지 내가 붙들고 갈 삶의 목표다. <끝>


시(詩)

주민등록증번호

주민등록증을 받았을 때
나는 너무 놀랐네
주민증 앞 번호에
내 생일이 들어 있어

태어나면 출생증 번호
성인 되면 시민증 번호
입당하면 당원 번호
북한에선 내 번호는 많지만
내 생일, 내 존재가 없었던
인민의 순번, 노예의 순서였네

하여 나는 살짝 웃었네
대한민국 주민증을 받는 이날
주민번호 알게 된 이날이
내 비로소 사람으로 태어난
내 삶의 진짜 생일이어서

/장진성 탈북시인

위 글은 교회신문 <33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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