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인 수기] 뼛속까지 유일사상 심는 북한 체제

등록날짜 [ 2013-04-16 14:17:09 ]

공사판에서 노동에 시달리며 몸은 점점 망가져 가고
10년 만에 어머니 만나려고 어렵게 중국행 결심했으나
뜻하지 않게 경로는 중국이 아닌 남한을 향하는데…


<사진 설명> 1% 당원을 위해 99% 주민들은 계속되는 노동 착취에 몸은 망가질 때로 망가져 간다.
사진은 영화 '크로싱'의 한 장면.


가족과 모두 이별하고 혼자 공사장에 다니다가 본격적으로 공산당 입당 심의를 받으러 다녔다.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 10대 원칙과 김일성주의 등 사상적으로 철저하게 무장했고 학습 상태를 검열하는 기간이라 얼마나 많이 공부했는지 모른다. 맨 아래 조직에서부터 단계를 거쳐 가며 합격하여 드디어 조선노동당 후보당원이 되었다.

후보당원이 되면 일 년 동안 정말로 당에 충실한 사람인지 시험하는데 이 기간에 김일성유일사상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당원 자격이 박탈된다. 어떻게 하면 이 시기를 잘 견뎌낼까 고민하다가 평양-남포 고속도로 건설현장에 자원해서 나갔다. 사실 후보당원 기간만 잘 넘기면 되지만, 집도 없이 생활하던 중이라 혹시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되어 힘들더라도 고속도로 건설장에 자원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고속도로 건설현장에서 내 청춘을 다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내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힘겨웠다. 잠자리는 돼지우리처럼 바닥에 볏짚을 깔고 잤고, 먹는 것은 잡곡밥에 시래기 소금국과 김치 몇 조각으로 연명하였는데 노동의 강도가 얼마나 센지 죽어나간 사람이 꽤 많았다.

그 고속도로 길이는 42.216km인데 이 숫자는 김정일 탄생일 1942년 2월 16일을 뜻한다. 이렇게 북한에서는 뭐든지 김일성, 김정일 우상화가 먼저다. 이 도로를 건설하는 위치가 논밭이 있던 곳이라 땅을 10m도 더 높게 올려야 했다. 그런데 그 당시는 ‘고난의 행군’ 시기라 기계가 없었고, 기계가 있더라도 기름이 부족하여 모두 사람의 힘으로 건설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 사람들에게 내가 50~60kg쯤 되는 흙 마대를 머리에 이고 십 리 길을 왕복했다고 말하면 믿지 않는 눈치인데 다 사실이다. 그때는 그런 힘이 어디서 났는지 모르지만, 오로지 당원이 되려는 생각에서 나왔을 것이다. 어쨌든 밤낮없이 일하는데 여자의 몸으로 남자들과 똑같이 일했으니 내 몸은 혹사당해 망가지기 시작했고 결국 병을 얻었다. 점점 걷기가 힘들더니 앉은뱅이가 된 것처럼 아예 걸을 수가 없었다.

중대에서는 나를 휴식하게 했는데 며칠 쉬면서 고모가 보내 주신 약을 먹고 조금 걸을 수 있게 되었지만 절름발이처럼 절뚝거리며 걸어 다녀야 했다. 가족도 없이 몸도 망가진 내 신세 때문에 힘들고 외로웠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북한 체제를 불평한 적이 없었다.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았기에 그렇게 사는 것이 최선의 삶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으니 이제 와서 생각하면 가슴을 치며 통탄할 일이다.

그렇게 말할 수 없이 힘들고 어려운 1년을 무사히 보내고 드디어 조선노동당 당원증을 받게 되었다.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뻤지만 그동안 겪은 고난들이 떠오르고 또 한편으로는 이 기쁨을 나눌 가족이 아무도 곁에 없다는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공사가 끝나고 갈 곳이 없어 고모 댁에 얹혀살다가 눈치가 보여 결국 합숙하는 공장에 취직했다. 그래도 합숙소에서는 하루 세 끼 국수를 주어 끼니를 거르지 않으니 다행이었다.

하루는 공장에 있는데 어떤 사람들이 나를 찾아왔다. 조용히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나갔더니 무엇을 적은 종이를 나에게 주었다. 자세히 보니 부모님과 동생의 이름이 적힌 쪽지였다. 어머니가 나를 데려오라고 했다면서 OO까지 가면 어머니와 전화 통화를 할 수 있다고 했다.

직장에서 휴가를 얻어 기차를 타고 이틀 걸려 OO에 도착해 보니 낯선 집에는 나처럼 가족과 통화를 하려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며칠을 기다리던 어느 날 밤, 드디어 전화 통화를 했다. 내 심장은 “쿵쿵” 방아를 찧고 10년 만에 듣는 어머니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을지 걱정도 되었다.

“여보세요, 명희니?” 어머니 목소리를 듣는 순간 눈물부터 쏟아졌다.
“명희야, 엄마다! 엄마 목소리 들리니?” 울면서 말하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나도 울며 어머니를 불렀다.
“명희야, 엄마한테 와라. 여기 오면 거기서처럼 힘들게 살지 않아도 되고,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입고 싶은 것 다 입을 수 있어.”
“엄마, 나 공산당원이야. 나 휴가받아서 왔어. 내가 살기 힘들어서 돈이나 좀 도움받으려고 온 거지, 거기 갈려고 온 거 아니야.”
“엄마가 돈을 줄 테니 나 있는 곳으로 와라, 죽기 전에 네 얼굴이라도 한번 보자.”
“엄마가 어디 있는데?”
“중국 OOO에 있어.”

한참을 생각하다 10년간 보지 못한 어머니가 죽기 전에 얼굴이나 보자고 애절하게 말하시는 목소리를 차마 외면할 수 없어 가겠다고 말했다.

그다음은 나를 데리고 온 사람의 지시대로만 움직였다. 이제부터는 어머니를 만날 생각에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주로 밤에 움직였는데 며칠 걸려 두만강을 넘었고, 그다음엔 중국 사람들에게 이끌려 어디론가 따라갔다. 중국 어느 집에서 또 어머니와 통화를 하게 되었다. 이틀 후면 만날 수 있으니 맛있는 것을 많이 사 주면 배탈 나지 않게 천천히 먹고 오라고 계속 당부했다. 북한에서 잘 먹지 못하다가 갑자기 기름진 음식을 먹고 탈 나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어머니를 만난다는 생각에 지난날의 모든 시름을 잊기로 하고 머리부터 신발까지 새것으로 바꿔 신고 움직였다. 여러 번 버스로 이동한 후로는 모두 12명이 탄 작은 차로 이동했다. 이틀이면 만난다는 거리가 너무 멀어 점점 의심이 생겼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 OOO로 가는 줄만 알았더니 우리 일행이 한국행을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일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여 조선족 브로커를 찾아 어머니와 통화하게 해 달라고 졸랐다.

“여보세요, 엄마? 여기 사람들이 하는 말이 남조선으로 간다는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래, 네가 지금 남조선으로 오고 있어. 아버지랑 둘째도 다 지금 한국에 있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남조선이라니요? 엄마가 지금 제정신이에요? 내가 심장이 터져 죽는 걸 보고 싶어요? 난 당원인데 어떻게 남조선에 간단 말이에요. 나는 오늘 중으로 빨리 돌아가야 한다구요. 내일까지 휴가라서 결근하면 평생 꼬리표가 붙어 다닌단 말이에요!”

나는 거침없이 퍼부었다. 어머니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울다가 “내가 잘못했다. 네가 너무 보고 싶은데 너를 데려오려고 사실대로 말하면 네가 오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말을 했다.”

“나를 도로 북조선으로 보내 줘요. 왔던 길로 다시 갈 수 있게요.”

<계속>



시(詩)

그들의
마지막 얼굴

-고난의 행군 시기에


눈 감겨 줄
작은 손도 없어
제 그림자 깔고
여기저기
누워 있는 시체들

산 사람들 위해서
구제미(救濟米)를 실어 나를
트럭도 없어
기름도 없어
죽어서도 땅에 묻힐 소원으로
하루하루 썩어가는 시체들

누구는 먹지 못해 죽었는지
해골이 보이는 얼굴이고
누구는 얼어서 죽었는지
온몸이 둥그렇게 굳어지고
누구는 병들어 죽었는지
구더기가 욱실거린다

이렇게 죽든
저렇게 죽든
그들의 마지막 얼굴은
신통히도 하나 같다
살아 있는 우리보다
훨씬 편안한 모습

장진성 탈북시인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
(장진성 著, 조갑제닷컴)에서

위 글은 교회신문 <33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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