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6-04-26 13:17:54 ]
“이제 새사람 되었답니다”
김만순 권사(새가족여전도회)
교회에 다닌 햇수는 수십 년, 직분은 권사다. 그런데 한동안 정착할 교회를 찾지 못해 갈등을 겪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주님, 저 어떻게 해요!’ 하고 있는데, 하루는 예전에 우리 사업장 직원이었던 사람에게서 뜻밖의 문자가 날아왔다.
“사장님, 저 이제 교회에 다녀요. 다 전도해 주신 덕분입니다. 연세중앙교회에 다닌 지 1년 됐어요.”
‘연세중앙교회’란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게도 가고 싶어 사모하던 교회가 아닌가? 기독교TV로 윤석전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성령 충만한 설교 말씀에 은혜받았다. 그럴 때면 연세중앙교회 교인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반갑기만 한 옛 직원의 안내로 지난 3월, 범박동연세중앙교회 춘계대심방 예배에 참석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윤석전 목사님을 가까이서 뵈었다. 설교 말씀에 실컷 은혜를 받은 후, 목사님께서 성도들에게 기도해 주실 때는 뜻밖에도 치유의 은혜까지 체험했다. 4년 전부터 양쪽 눈에 눈곱이 끼어 한곳을 오래 바라보면 눈이 핑 돌고, 머리까지 어지러웠다. 병원에서는 노안 탓이라고 했는데, 병원과 한의원을 전전하며 안약에다 한약을 복용했지만, 좋아지는 듯하다가 금세 도졌다. 그런데 윤석전 담임목사님께서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하는 순간, 몸이 후끈할 정도로 뜨거워지더니 순간에 눈곱이 사라지고 눈 주위가 말끔해졌다.
그 주일에 연세중앙교회에 가서 등록했다. 예배시간마다 성령의 감동에 따라 오직 성경 말씀대로 전하시는 설교 말씀을 듣자 주체 못할 정도로 눈물이 쏟아졌다.
“성경 말씀대로 살아라!”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는 말씀이 왜 그렇게도 은혜가 되는지….
교회에 등록한 다음 주부터 ‘전 성도 40일 그리고 10일 작정 기도회’가 시작됐다. ‘이번 기회에 정말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새사람 되어 보자’ 결심하고 작정 기도회에 참석했다. 저녁 기도회뿐만 아니라 일당을 주고 사람을 사 가게를 맡겨 놓고 오전 기도회에도 참석하고 있다.
날마다 하루 4시간씩 부르짖어 기도하니까 내가 새사람으로 점점 변화됐다. 평소에는 사업장 일을 마치고 나면, 직원들에게 “에계? 겨우 이거 팔았어?” 하던 내가 이제는 “아이쿠, 많이 팔았네. 고생했어, 뭐 먹고 싶은 것 없어?”라고 다정스레 말하고, 가정에서도 남편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도와주면 “고마워요”라고 살갑게 미소 짓는다. 그동안 ‘야’라고 부르던 며느리 호칭도 이제는 “준수 아비야, 준수 어미야”로 바뀌었다. 아들네 부부는 “엄마, 왜 그래? 뭔 일 있어?” 하며 놀라워한다. 은혜받고 기도하니까 사업장과 가정이 천국으로 변했다. 이렇게 변화한 것은 모두 주님의 은혜다.
그렇게 하루 2번씩 인천과 서울을 오가며 기도한 지 20일이 되자 하나님께서 놀라운 기도응답을 부어주셨다. 남편이 제사를 목숨보다 중요히 여겨 그동안 제사를 끊지 못했는데 바로 며칠 전 남편이 선언했다.
“여보, 나 이제 제사 다시는 안 지낼게.”
기도응답은 그뿐만이 아니다. 아들이 6년 만에 다시 교회에 나와 하나님께 예배드리겠다고 약속했다. 윤석전 담임목사님께서 전도해서 지옥 가는 영혼 살리라고 애절히 말씀하시니 아들에게 한마디씩 권면한 것이 이렇게 응답으로 열매 맺게 된 것이다.
이제 그렇게도 사모하던 연세중앙교회에 왔으니 이 마음, 이 믿음 변치 않고 주님 오시는 날까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새사람 되어 평생 주님 섬기며 살고 싶다. 나를 연세중앙교회로 부르신 주님께 모든 영광과 감사를 돌린다.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아버지를 만나다
정성덕 성도(새가족남전도회)
보통 내 나이 또래 가장(家長)이라면 아직 건장해서 가족들을 봉양하느라 땀 흘려 일할 것이다. 유통업에 몸담던 나도 가족을 위해 열심히 땀 흘리며 살아왔다. 오래전 세상을 떠난 아내 몫을 대신해 남매를 잘 키우려고 애썼다.
그렇게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살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뜻밖에 신체를 공격하는 병마는 어찌해 볼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오른쪽 마비에 언어장애까지 왔다. 내 몸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딸은 나를 서울로 데려와 병간호와 직장생활을 병행했다. 또 주일에는 교회에 데리고 갔다. 하지만 한평생 불신자로 살아온 나로서는 신앙생활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딸의 간곡한 권유를 뿌리칠 수 없어 몸은 교회에 갔지만, 마음은 세상을 헤매고 다녔다. 설교 말씀이 일절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재활치료를 받아 운신할 정도가 되자 딸의 만류를 뿌리치고 내가 살던 시골로 내려갔다. 예전 생활로 돌아갔고 세상을 벗 삼아 지냈다.
2년 후, 뇌출혈로 두 번째 쓰러졌다. 오른쪽 전신에 마비가 와서 한 걸음도 걸을 수 없게 됐다. ‘회복불능.’ 의사가 내린 진단이었다. 언어장애도 심각해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다. ‘이젠 끝이구나.’ 살고픈 희망이 산산히 부서졌다.
딸의 손에 이끌려 다시 서울로 왔고, 또다시 재활치료와 신앙생활을 병행하게 됐다. 딸의 부축을 받아 주일예배에 갔을 때, 두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같은 병으로 두 번씩이나 몹쓸 장애를 입은 몸으로 하나님 앞에 나온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부끄러웠다. 딸이 기도하며 눈물 어린 권면을 여러 차례 했지만 모질게 뿌리쳤었는데, 모든 것을 잃고 나서 주님을 붙잡으려 하니 염치가 없어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 풍성하다고 했던가. 담임목사님의 설교 한 말씀 한 말씀이 죄로 가득한 내 마음을 후벼 팠다. 살아온 지난날에 대한 회개는 날이 갈수록 뜨거워졌다. 딸은 직장 다니랴, 아비 돌보랴, 교회에 데려오랴 늘 종종걸음으로 바빴다.
그런 딸이 고마워서 나도 새벽부터 온종일 담임목사의 설교에 귀를 고정하고 눈은 성경에 고정하며 하루를 보냈다.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신 주님의 고귀한 사랑이 뼈저리게 고맙고 감사했다. 비록 병든 몸이지만 내게 주신 하루하루가 덤으로 주신 선물 같았다.
청년부에 소속해 한창 재잘거리며 부원들과 환하게 웃어야 할 나이인 딸이 남전도회 새신자실에서 나의 손과 발이 되어 늘 내 옆에 있다. 그 고충이 얼마나 클까. 딸의 돌봄과 예수님의 역사하심을 믿고 늘 기도하면서 믿음으로 장애를 극복하고 있다.
퇴원할 때 의사가 말했다. “혼자서는 절대 움직일 수 없을 거예요. 조심하세요.” 하지만 어느덧 감각이 없던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부드러워져서 딸이 부축해 주지 않아도 혼자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됐고, 요즘은 혼자 걷기도 한다. 언어장애도 곧 주님께서 고치실 줄 믿는다.
주님께 받은 은혜와 그 사랑, 딸과 교회 식구들의 보살핌이 태산보다 높고 크지만, 장애로 닫힌 입으로 주님을 증거할 수 없어 안타깝다. 속히 내 입을 열어 주님을 자랑할 그 날을 애타게 기다린다.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나는 내 온몸으로 그 사랑, 그 은혜를 표현하며 감사하며 살고 싶다. 평생 벙어리로 살지라도 마음으로는 주님 부르시는 그 날까지 주님을 찬양하며 살고 싶다.
정리 동해경 한기자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477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