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4-07-01 13:35:10 ]
끝까지 인내해 준 전도자에게 감사
신진헌 성도(38남전도회)
4년 전, 교회에 처음 왔다. 그 당시 아이들이 4세, 6세였다. 전도자인 정명선 집사가 유아유치부 영어예배에 두 아이를 매주 데려다 주었다. 지극한 섬김에 죄송한 마음이 들었는지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올 겸 교회에 나갔다가 예배에 참석했다. 몇 번 예배드리더니 은혜를 받았는지 내게도 교회에 같이 나가자고 권면했다.
당시 직장일이 잘 안 되고, 아버님이 암으로 투병 중이라서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군에 있을 때 교회에 다녀 보았기에 낯설지 않아 그러자고 했다.
처음에는 주일낮예배만 참석했다. 설교 말씀을 들으니 마음이 평안해졌다. 이어 새신자 교육도 받고, 침례도 받았다. 5개월간은 매주 예배에 참석하다시피 했다.
그러던 중,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아버님이 구원받지 못하고 돌아가시니 불효자가 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이래저래 예배에 참석할 마음이 생기지 않아 교회와 멀어졌다. 그래도 전도자의 권유에 못 이겨 두 달에 한 번꼴로 예배에 참석했다. 그렇게 가뭄에 콩 나듯 교회에 와도 나름대로 믿음이 생겼는지 어느 날 문득 ‘이번이 내가 예수 믿을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아버지께서 신앙생활을 예전부터 하셨으면 천국 가셨을 텐데…. 아쉽지만, 어머님은 살아 계시니까 천국 보내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머니를 교회에 모셔 왔다. 어머니는 설교 시간이 길어서 힘들어 하셨다. 게다가 직장에 다니셔서 일주일 중 하루 쉬는 날 교회에 오시려니 힘겨워 하셔서 예배에 빠진 날도 많았다. 그래도 차츰 은혜 받으셔서 지금은 좋아하시는 술도 줄이셨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진정 감사합니다’ 찬양을 입에 달고 사신다. 예배를 드리면 아픈 몸도 편해지신다며 복음에 푹 젖어든 모습을 보이신다.
나도 처음에는 주일낮예배만 나오고 다른 예배에는 다니지 않았다. 지금은 예배마다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무엇보다 심리적인 안정을 찾아 감사하다. 초신자 때는 예수 믿으면 물질을 포함해 많은 복을 받는 줄 알았다. 돌이켜보면 물질을 떠나서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아 살아가는 것이 큰 은혜라고 깨닫는다.
아이들도 어릴 적부터 하나님 말씀을 들으며 자라니 안심이 된다. 우리 가족은 신앙적으로 부족한 면이 많다. 그래서 신앙생활 하는 데 문제가 생기지 않게 늘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신앙생활 할 힘을 공급해 주셔서 감사하다. 매사에 감사하고, 숨 쉬고 사는 것도 감사하다. 우리 가족을 여기까지 이끄신 주님께 감사한다. 또 전도자와 사랑으로 섬겨 주신 모든 남전도회원께도 감사한다. 앞으로 더욱 견고한 믿음의 가장으로 살고 싶다.
전도자의 부단한 노력, 가슴에 와 닿아
정현호 집사(38남전도회장)
스무 살 외로운 재수생 시절, 스스로 콤플렉스에 빠져 사회낙오자라는 딱지를 붙인 채 수험생 생활을 어렵게 하던 때였다. 하숙집에서 노량진 학원을 오가는 골목에는 전도자가 많았다. 그날도 평소와 같이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을 만나러 가던 중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한 자매가 “시간 좀 내줄 수 있느냐”며 다가왔다. 사랑니 제거 치료를 받고 전도 현장에 바로 왔다는 그녀의 퉁퉁 부은 얼굴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선뜻 초청에 응했다.
1997년 5월 23일 총동원주일이었다. 죽을힘을 다해 외치는 담임목사의 강하고 열정적인 설교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모습이 매우 진실해 보였다. 성도들이 열정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모습도 죄짓던 내 생활에 제동장치가 되었다. 바르게 살아야겠다는 의지와 생각을 심어 주는 하나님 말씀이 사모되어 예배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하나님을 만나려고 연세중앙교회에 왔습니다. 살아 계시다면 나를 만나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다시는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그해 8월 흰돌산수양관 청년성회를 10여 일 앞두고 잠자리에 들기 전 매일 10분씩, 막무가내식으로 기도했다. 성회는 ‘청년아, 영원한 플러스 인생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진행되었다. “젊음의 때에 영혼의 때를 위하여 사는 자는 엄청난 이윤을 남길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삶은 죄 때문에 적자를 남길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 그대로 믿어졌다. 하나님을 모르고 죄악으로 인생을 낭비한 것이 인정되면서 첫날부터 회개의 봇물이 터졌다.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바로 방언기도가 터져 나왔다. ‘매일 밤 정한 시간에 1시간 기도하겠다’고 하나님과 약속했고, 그 기도는 1999년 입대 전까지 이어졌다.
우연한 기회에 고등학교 친구를 만났다. 목회자의 길을 사모했으나 부모의 반대에 부딪혀 낙심해 있었다. 그 친구에게 우리 교회를 소개해 주었더니 1년간 우리 교회에서 영적으로 충전한 후 현재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
내 경우에는 전도자의 세밀하고 지혜로운 1:1 양육이 신앙 성장에 큰 도움이 됐다. 핸드폰이 없던 당시, 전도자는 무선호출기에 은혜 받은 내용을 음성메시지로 매일 남겨 주었고 나는 밤마다 그것을 들으며 고된 수험생활을 이겨 냈다. 매 순간 무릎으로 중보했을 전도자의 눈물의 기도도 빼놓을 수 없다. “가장 은혜 받았을 때 주님의 부름을 입고 싶다”던 전도자의 영혼의 때를 향한 사모함이 무엇보다 커 보였다. 그렇게 영적으로 살려고 부단히 노력한 전도자의 모습이 내 신앙생활의 가이드가 되었다. 이후 전도자는 신학을 전공한 후 남편과 함께 목회를 하고 있다. 전도자를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의 길을 열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정리 장선화 한기자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391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