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렇게 전도받았다] 12년 전, 전도주일에 첫발을 내딛으며 外

등록날짜 [ 2014-10-20 13:46:21 ]

12년 전, 전도주일에 첫발을 내딛으며
진상여 집사(17교구, 70여전도회)

중학교 동창(이은희 집사)에게 전도받아 연세중앙교회에 첫걸음을 한 것은 12년 전이다. 연세중앙교회가 성전을 노량진에서 궁동으로 이전할 무렵이었다. 처음에는 믿음이 없어서 주일 낮 예배만 겨우 드리고 오후에는 쇼핑하러 돌아다니거나 미뤄둔 일을 했다. 이듬해 여름, 동창의 강력한(?) 권면으로 청년하계성회에 참석하게 됐다.

당시에 간호사로 병원에서 근무하였는데, 34일간 열리는 하계성회에 참석하려고 휴가를 3일 냈다. 흰돌산수양관에 오니 윤석전 목사님께서 회개하라고 강력히 말씀을 전하셨지만 나로서는 딱히 회개거리가 생각나지 않아 남들이 기도할 때 멀뚱멀뚱하게 쳐다만 보았다. 별다른 은혜를 받지 못한 채 휴가가 거의 끝나갔다. 성회 셋째날 아침, 그날도 간절한 사모함이 없었기에 성전 2층에 앉았다. 성회 때, 윤석전 목사님께서 나오셔서 원래 이 말을 전하려고 한 것은 아닌데...” 하시면서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뱃속에 살아 있는 태아를 죽이도록 도와주는 것도 죄다. 회개하라!”

비수처럼 그 말씀이 심령에 꽂혔다. 산부인과 간호사인 내게 하시는 말씀이었다. 그동안 산부인과 간호사로서 살아온 지난날이 죄악이 떠올랐고, 처음으로 회개기도가 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오전 성회가 끝나고 소나기가 쏟아지니 빨리 집에 돌아가서 쉬고 싶었다. 신입반 직분자들에게 이제 휴가가 끝나가니 집에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동창과 직분자들은 오늘 저녁예배까지 드리고 가라며 강권했다. 처음에는 심하게 거부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저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를 붙드시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직분자들이 저녁성회를 마치면 집에까지 차로 태워다 주겠다고 해서 마음을 바꿔 저녁예배에도 참석했다.

저녁성회까지 마치고 직분자의 도움으로 집에 돌아왔다. 1시가 넘었다. 짐을 정리하고 난 후, 주위에 온통 적막만이 흐르는 그 시간, 성회에서 들었던 말씀들을 곰곰이 되새겨봤다. 그리고 난생처음으로 혼자 있을 때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 기도했다. ‘주님, 정말 나를 위해 죽으셨어요?’

주님을 마주한 듯 조용히 대화하듯 기도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얼굴에 경련이 일 정도로 흐느낌이 밀려왔다. 울부짖어 기도하며 죄인 줄 알지 못하여 생명을 무참히 죽이는 일에 동참한 죄를 낱낱이 고백했다. 그러면서 방언이 터졌다. 그날 주님을 내 안에서 뜨겁게 만났다. 그해 23일간 하계성회에 다녀온 후, 내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내 죄를 사해주신 예수를 직접 뜨거운 심장으로 만나고 나니, 왜 신앙생활 해야 하는지 저절로 알게 됐고, 그때부터 주일을 온전히 주의 날로 지키며 신앙생활하게 됐다.

퇴근 후, 늘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귀가했다. 금요철야예배 때면, 당시 노량진에 있던 성전에서 예배드리고, 기도하러는 궁동 성전으로 왔다가 다음 날 새벽 4시쯤 돼서야 귀가했다. 주님과 첫사랑에 빠져 피곤한 줄도 모르고 열정적으로 기도했다. 불신자이신 부모님의 눈에는 외동딸이 예수에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부모님께 핍박도 무척 받았다. 한번은 기도하다가 늦어지자 부모님께 혼날까 두려워 집 앞에 주차하고 차 안에서 잠을 청한 적도 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16:31) 하신 말씀처럼 지금은 무섭게 핍박하던 어머니께서 나와 함께 우리 교회에 예배드리러 오신다. 믿음 주신 주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린다.


가족 구원의 중요성 깨달아
조은혜 집사(13교구, 70여전도회)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보면, 어머니는 43녀 중 막내인 나를 겨울에 어렵게 낳고는 늘 아프셨다. 할머니는 무당이었는데 신내림을 받아야 나을 병이라며 어머니를 다그쳤다. 하지만 어머니는 큰오빠의 전도로 주일이면 아픈 몸에도 나를 업고 교회에 가셨다. 어머니는 점점 쇄약해져서 내가 네 살 되던 겨울, 세상을 떠나셨다.

4년 후, 아버지가 새어머니를 들였는데, 무당이었다. 새어머니는 허구한 날 아버지께 하소연하기 일쑤였다. “아이들 때문에 힘들어서 못 살겠어요.”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때렸다. 새어머니는 자주 가출하셨는데, 아버지는 새어머니를 찾아오라며 온 집안을 들쑤셨다. 큰오빠와 큰언니는 객지에서 사회생활을 했는데 집에 남은 우리는 더는 견딜 수 없어서 큰오빠, 큰언니에게 편지를 썼다. 바로 집에 온 큰오빠와 큰언니가 아버지와 우리를 인천으로 데리고 갔다.

큰오빠는 제일 먼저 다닐 교회를 찾아주었다. 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는 교회에 가본 적이 없었는데 오빠 덕분에 다시 교회에 다니게 됐다.

세월이 흘렀는데도 어찌된 일인지 우리 집안에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어느날, 아버지마저 가출하셨다. 얼마 후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새어머니는 사고 현장에서 돌아가셨고, 아버지도 다쳤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 무렵, 출석하던 교회에 문제가 생겨서 교회 문을 닫게 됐다. 새로 다닐 교회를 찾던 중에 학교 동창의 소개로 연세중앙교회에 오게 됐다. 그것이 벌써 16년 전 가을 이 맘 때다.

청년회 신입반에 소속했는데, 연세중앙교회 청년들은 신앙생활을 무척 강도 높게 했다. 신입반에서는 월요일마다 새벽 1시까지 철야예배를 드리고, 2시까지 합심기도를 한 후, 2시 반쯤 귀가해 잠을 청했다. 마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와 같았다. 그런 철저한 신앙생활을 동경했기에 나도 동참하였고, 합심기도하던 중에 사모했던 방언 은사를 받았다.

연세중앙교회에 와서 비로소 아버지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다. 윤석전 목사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부모 공경을 얼마나 강조하시는지, 설교 말씀을 듣다보면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이 절로 생겼다.

어린 시절에 자란 환경이 평탄치 않고, 아버지께 특별한 사랑을 받은 기억이 없지만, 그래도 나를 낳으시고 길러주신 아버지의 영혼이 구원받지 못해 지옥에 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를 구원받게 하고 싶어서 교회에 오시라고 권면하고 용돈도 많이 드렸다. 연로하신 아버지가 매주 인천에서 서울까지 오시기 힘들어하셔서 집근처에 은혜로운 교회를 찾아서 다니시도록 인도했다. 마침 실천목회연구원에 나오시는 목사님이 담임하시는 교회를 만났다.

노년에 예수를 믿어 신앙생활에 힘을 내실 무렵,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져 중환자실에 실려 갔다. 하루 두 차례만 중환자실 면회를 할 수 있어 남편과 교대로 아버지를 찾아갔다. 면회 때마다 담임목사님의 설교 말씀 테이프를 귀에 꽂아 드렸다. 청년회 담당목사님께서 함께 가셔서 아버지를 위해 기도해주셨다. 아버지께 지난날 알지 못해 우상숭배 한 죄를 회개하시도록 인도했다. 말을 못하셨기에 알아들으셨으면 고개를 끄덕여 보시라고 했더니 아버지께서 살포시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 후, 편안하게 주님 품에 안기셨다. 할렐루야!

평탄치 않은 가정환경이었지만 우리를 낳으시고 길러주신 아버지가 구원 받아 천국갈 수 있도록 전도하게 하신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린다.

/정리 한기자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406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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