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4-12-09 10:01:41 ]
진실한 섬김이 교회 편견을 없애
이선경 집사(여전도회)
10년 전 눈이 수북이 쌓인 날, 정초부터 급한 일이 생겨 택시를 탔다가 접촉사고가 났다. 병원 치료비를 청구하려고 직장에서 가까운 보험사를 찾았다. 직원 중 유독 친절한 분(정명숙 교구장)이 나를 담당했고, 담당자는 편안한 인상만큼 해당 업무도 정확하게 잘 처리해 주었다. 믿음직스러운 모습에 반해 내게 필요한 보험도 계약해 만남을 이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정명숙 집사님이 나를 연세중앙교회 예배에 초청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생각이 나서요.”
사실, 주변 사람들에게서 기독교인에 대한 부정적인 얘기를 많이 들어서인지 선입견이 있었다. 정 집사님이 기독교인만 아니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는데 자꾸 교회에 가자고 부탁하니 난감했다.
그러던 중, 크고 작은 문제에 부딪혀 괴로울 때면 왠지 의지하고 싶어 정 집사님께 종종 도움을 요청했다. 정 집사님은 그때마다 문제를 헤쳐 나갈 수 있게 진심 어린 위로와 지혜로운 조언을 마다치 않았다.
인생 경험담을 털어놓으며 전해 준 삶의 지혜, 시기적절한 도움은 내게 어려움을 잘 이겨 낼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때로 정 집사님은 준비한 선물을 넌지시 건네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꼭 필요해서 사려고 마음먹은 물건인 때가 많았다. 매사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말없이 겸손하게 섬기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자주 그런 배려와 섬김을 받다 보니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조금씩 사라졌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실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 집사님이 신앙생활 하는 교회라면 믿을 만하지!’ 싶어 만난 지 8개월 만에 연세중앙교회에 첫발을 디뎠다. 그런데 그날따라 설교 말씀이 ‘십일조와 헌물’에 관한 내용이었다. ‘아, 돈 얘기구나.’ 첫 설교에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두어 달이 지날 무렵, 각종 헌물은 오직 주님의 일, 영혼 구원하는 일같이 교회의 영적인 사정과 필요에 따라 가장 값지게 쓰인다는 것을 알고 나자 나 역시 자진하여 주님께 예물을 드리게 되었다.
당시 연세중앙교회는 구로구 궁동에 있었지만 대성전을 건축 중이라 예배드릴 공간이 부족해 청년들은 노량진성전에서 따로 예배를 드렸다. 정 집사님은 자녀가 셋이었는데도 궁동성전에서 장년부 대예배를 드린 후 바로 노량진성전으로 달려와 내가 은혜 받도록 내 곁을 지켜 주었다.
곧이어 흰돌산수양관 청년대학 동계성회에 참석했다. 직장 때문에 저녁 성회만 참석했는데 첫날부터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마치 하나님께서 내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렸고 가슴에 그대로 새겨졌다. 주님을 몰라 온갖 죄를 지으며 살아온 지난날들을 돌아보며 통한의 눈물로 회개하고 하나님을 뜨겁게 만났다. 정 집사님은 내가 은혜 받고 변화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 주었다.
돌아보니 어느새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전도자는 지금도 변함없이 나를 위해 기도해 주고 주님 사랑을 나눠 준다. 덕분에 이제까지 믿음을 지키며 신앙생활 하고 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마다 내가 전도자에게서 받은 사랑과 섬김을 나눠 주고 복음 전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무엇보다 부모님과 친척 분들이 꼭 예수 믿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사랑이신 주를 만난 감격
임은정 집사(여전도회)
내가 왜 사는지 의미를 찾고 싶어 대학교 내 기독교 동아리인 ‘기독교선교단체’에 가입했다. 그곳에서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돼 무척 기뻤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뿐. 체험 없는 성경 지식만으로는 마음의 공허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 스물여덟 살에 회사 동료이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착하고 이해심 많은 남편에게서 삶의 만족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시부모님과 남편에게 사랑을 듬뿍 받으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기대했다. 하지만 외로움은 더욱 커졌고 내 영혼의 만족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남편은 사업으로 바빠 얼굴을 못 보는 날이 늘어갔다. 게다가 남편은 계속 사기를 당하다가 결국 파산 지경까지 이르렀다.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환경에 부딪히면서 인생의 한계에 내몰렸다. 하루하루 삶이 두려워졌다.
그러던 중 큰 사건이 터졌다. 남편이 대형교회 인테리어 작업을 수주 받아 모든 재산을 투자했지만, 지인에게 고스란히 사기를 당하고 말았다.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아이를 급히 둘러업고 동네에 있는 교회 새벽기도회에 나갔다. 우리 가정을 도우실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으로 기도하고 예배에 은혜 받기를 사모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신앙생활 잘하고 싶었지만 내 곁에는 영적생활을 이끌어 줄 만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막막해진 심정으로 인터넷 설교 방송을 뒤졌다. 그러다가 윤석전 목사님이 설교하시는 영상을 봤다. 내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처럼,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사님께서 심장이 터져나갈 듯이 설교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내 입에서는 울부짖듯 통곡하는 소리가 터졌다. 그 자리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저 교회에 꼭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느 날, 전철역을 지나가다 연세중앙교회 노방전도 플래카드가 눈에 띄었다. 자석에 이끌리듯 전도자에게 “연세중앙교회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당시 전도자 조덕자 권사의 손에 이끌려 다음 날 연세중앙교회 삼일예배와 금요철야예배에 참석했다. 두 아이를 데리고 50일 작정기도회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남편의 구원과 우상숭배 끊기가 우리 가정에서 이뤄야 할 급선무였다. 영적 문제를 응답받고자 금식하며 흰돌산수양관 하계성회에 참석했다. 명절이 되면 교회에서 진행하는 성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조 권사님은 예배에 집중하도록 두 아이를 돌보아 주었고, 성경책, 예배 상, 옷가지 같은 신앙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세심하게 챙겨 주었다. 기도와 사랑, 지극한 섬김 덕분에 어려움 없이 교회에 잘 정착했다. 교회에 등록한 지 1년 만에 성전 가까이에 있는 집으로 이사했다. 극적으로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집 계약이 성사되지 않아 전전긍긍하던 차에 목사님께 기도받은 당일 막힌 문제가 해결되었다.
주님의 사랑 안에 살고자 몸부림치며 신앙생활 하는 내 영적인 변화는 남편에게 적잖이 충격을 주었고,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은 조금씩 신앙생활을 이해해 주고 때로는 도와주기도 하니 고맙기만 하다. 내가 주님께로 돌아온 후, 파산의 기로에 처한 남편의 사업이 되살아나 정상궤도를 달리고 있다. 남편도 하루빨리 신앙생활 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고 기도한다.
정리 장선화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41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