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내가 영혼으로 또 다시 만나세

등록날짜 [ 2024-03-06 15:10:50 ]


<사진설명> 지난 2019년 ‘전 성도 저녁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대성전으로 향하고 있는 홍외순 집사. 그해 6월 23일(주일) 10년 동안 저녁기도회에 매일 참가해 2시간씩 기도한 홍외순 집사에게 ‘3650일 기도상’을 수여했다.




<사진설명> 홍외순 집사와 아들 내외(박순복 집사와 김동원 성도).



<사진설명> 홍외순 집사가 윤석전 담임목사의 손을 꼭 잡으며 담임목사를 향한 성도의 애틋한 사랑을 전하고 있다.




“어머니, 누가 가장 보고 싶으세요?”


“목…사…님이…. 보고 싶어.”


올해 94세. 기력이 쇠하여 연약해졌으나 시어머님은 담임목사님을 떠올리거나 목사님에 관해 말할 때면 늘 눈이 초롱초롱해지곤 했다. 주님 나라에 이르기까지 복된 주의 사자를 만나 생명의 말씀을 들으며 90여 년 인생 여정을 오직 기도와 전도로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어머니는 늘 기도하고 전도하는 분이었다.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연세가족들에게도 믿음의 선배로서 큰 감동과 도전을 줬으리라.


하나님을 우대한 신앙생활과 삶

어머니(홍외순 집사)는 개척 이듬해인 1987년 1월 연세중앙교회 연희동성전에서 신앙생활 할 것을 결신했다. 젊어서부터 신앙생활을 해 온 어머니는 영적으로 깊이 있는 생명의 말씀을 듣기를 사모했고, 누군가에게 “연희동 지하에 조그마한 교회가 있는데 성령의 역사가 아주 뜨겁다는구먼”이라는 말을 듣고 물어물어 연세중앙교회에 찾아가 등록한 후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신앙생활을 하셨다.


어머니는 남대문시장 부근에서 떡 장사를 하셨다. 오래전부터 시력이 좋지 않아 사물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여서 어둑어둑한 새벽녘에 떡을 떼어 오는 일은 어린 아들(김동원 성도)이 도맡아 했다. 어머니는 노점에 앉아 떡을 팔 때면 떡을 건네면서 모든 사람에게 “예수 믿으세요”라고 복음을 꼭 전하셨다.


눈이 잘 보이지 않으니 속이는 사람도 많았고, 단속반이 들이닥칠 때면 다른 상인들이 물건을 들고 도망가는데도 어머니는 팔던 떡을 빼앗기기 일쑤였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고단한 삶. 남대문 쪽방촌 단칸방에 몸을 누일 수 있다며 감사해 했지만, 남매 둘을 키울 수 없어 형편상 딸은 친척집에 맡기고 아들만 데리고 살게 되었다.


자유분방하던 아들 탓에 어머니는 늘 애를 태우곤 했다. 주변 상인들이 아들을 향해 악담을 퍼부으면서 어머니를 멸시했으나, 심성은 착해 어머니를 대신해 새벽 3~4시에 떡을 떼어 장사하도록 돕는 아들이었으므로 어머니는 그 누구보다 대견한 아들을 위해 소망을 품고 기도했으리라. 아들 김동원 성도도 매일기도회에 참석하는 어머니를 모시고 연희동 성전까지 데려다 드리곤 했다.


당시 어머니에게는 철칙이 있었는데 그날 장사해 번 돈을 방바닥에 펼쳐 놓고 일일이 손으로 만져 봐서 십일조와 주정예물 그리고 감사예물을 철저하게 구분해 주님께 드리곤 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날은 하루에 번 돈을 다 예물로 드리기도 했으나, 어머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천지만물을 주신 주님께 주님 것을 먼저 드렸다. 비록 남루한 삶이었지만 돈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전도한 사람들의 어려운 형편까지 챙기며 구십 평생 먹을 것 입을 것 생활비까지 섬겨 왔다.


믿음의 가정에 시집온 내 이야기를 잠시 해보려고 한다. 나는 직장에서 남편을 만났다. 교회는 전혀 가까이하지 않았으나 남편이 “우리 엄마는 교회만 잘 다니면 좋아한다”고 해서 ‘교회? 뭐 다니면 되지’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연세중앙교회였다.


당시 어머니와 남편은 나를 망원동성전으로 데려갔고 처음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나는 글로리아선교단원들이 천사처럼 진실하게 찬양하는 모습을 보며 이전 어디에서도 경험한 적 없는 황홀함을 느꼈다. 처음 간 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어머니에게 잘 보이려고 교회도 열심히 다니려고 했지만 믿음의 용어가 낯설어서였는지 설교 말씀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더군다나 남편을 따라간 집을 보고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쪽방 한 칸에 따뜻한 물은 꿈 같은 일이었고, 그 당시에도 드물었을 석유곤로를 사용하는 모습에 이런 집에서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아 뛰쳐나와 버렸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얼마 후 남편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여차저차 결혼까지 하게 되어 그 단칸방에서 시어머니와 우리 부부 셋이서 함께 자고 함께 생활했다. 그때부터 나는 어머니의 눈이 되어 남대문에서 노량진으로 매일 철야기도회에 참석하고 새벽 5시 첫차를 타고 다시 남대문 집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3년간 했다. 아마 내 믿음도 그때 많이 성장한 듯하다.


그러다 우리 부부가 노량진으로 이사오게 되었고 어머니는 떡 장사를 계속 하느라 남대문 단칸방에서 1년간 더 살다가 우리 집으로 모셔 왔다. 이후 어머니께 떡 장사를 그만하도록 간곡히 부탁드린 후 용돈을 드리기로 했지만, 어머니는 신령한 습관대로 용돈을 받아도 예물을 먼저 드리고 나머지는 전도자를 섬기는 일에 모두 사용하였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긴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육신의 때의 모든 시름 내려놓으며

결혼 이후에도 비신자나 다름없던 아들은 어머니의 근심이었고, 자유분방한 남편은 나에게도 기도 제목이었다. 교회가 궁동으로 이전하면서 우리도 궁동으로 이사왔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형편에 집을 구할 수 없었다.


다행히 당시 집값의 대부분을 대출받을 수 있어 적은 돈으로 집을 매입할 수 있었다. 20평도 안 되는 작은 빌라를 사려고 하자 어머니는 사려면 큰 평수로 사라고 종용하셨다. 큰 집을 사서 그 많은 빚을 어찌 갚으려고 그러시나 싶어 의아했다. 결국 어머니의 고집을 못 이겨서 매입하기는 했으나 빚 갚을 생각에 앞날이 캄캄했다.


그런데 집을 사고 난 후 남편이 다니는 회사 사장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남편에게 회사를 맡아 달라고 했고, 남편은 긴 고심 끝에 회사를 직접 운영하기로 했다. 이때부터 자유분방하던 남편의 모습은 사라지고 자영업자로서 성실한 면모를 갖추더니 3년 만에 집 대출금을 모두 갚을 수 있었다. 이후로도 어머니는 성전 근처로 집을 옮겼으면 하는 바람을 비치셨고, 성전 바로 옆에 있는 더 좋은 집으로 이사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어머니의 쉼 없는 기도 덕분이리라.


궁동성전에 와서도 어머니는 매일 새벽예배는 물론이거니와 사물만 겨우 가늠할 수 있는데도 노방전도를 늘 나가셨다. 그리고 잠들 때까지 설교 말씀을 즐겨 듣는, 삶 자체가 예배라 해도 될 만큼 신앙생활에 열심이셨다.


그러나 4년 전 코로나19 사태 기간에 교회에 가기 어려워지자 누구보다 마음 아파하며 눈물 흘리곤 하셨다. 365일 새벽예배와 공예배에 빠지는 일 없이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교회에 발을 디디지 못하자 이때부터 어머니는 깊은 시름으로 몸의 기력까지 쇠하였다.


2023년 가을로 접어들면서 어머니의 기력은 더욱 쇠하여 교회 가기를 버거워하셨다. ‘교회 가서 예배드리는 것을 생명처럼 여기고 그렇게 좋아하던 분이 얼마나 힘이 들면 이러실까!’ 11월이 되면서 몸을 가눌 수 없어 예배 시간에도 거의 누워 계셔야 했고, 12월부터 아예 몸져눕고 말았다.


우리 부부가 운영하는 사업장은 12월과 1월 두 달간 일이 아예 없어 편찮은 어머니를 간호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형편상 남의 손에서 자란 어머님의 큰딸은 서운함이 커서 어머니와 서먹한 상태였으나, 어머니가 워낙 위중한 상황이었기에 큰시누이에게도 조심스레 소식을 전해 두었다.


새해에 이르러 1월이 되면서 내 마음은 조급해졌다. 2월부터는 사업장이 많이 바빠지기 때문에 어머니를 다른 사람 손에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동안 하나님께 어머니의 임종을 우리 가족이 지킬 수 있도록 늘 기도해 온 것처럼 기도하는 데 더 집중하곤 했다.


소천하기 일주일 전부터 어머니는 기력이 없어 아무것도 목으로 넘길 수 없었으나 입술을 가늘게 떨면서 기도를 멈추지 않으셨다. 링거 하나, 약 한 알 복용하지 않아도 크게 힘들어하지 않으셨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였다.


그리고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였는데 소천하시기 하루 전 어머니와 서먹하던 큰시누이가 어머니를 보러 왔고 눈물을 흘리며 평생의 마음의 짐을 풀었다. “엄마, 나 괜찮으니까 예수님 손 잡고 평안하게 천국 가셔. 나도 곧 따라갈 테니 먼저 가 계셔”라며 70년 동안 옭아매고 있던 애증을 풀어냈다. 남편도 어머니 귀에 대도 “엄마, 나 예배드리고 왔어. 이제부터 엄마의 평생 소원인 신앙생활 잘할게. 걱정하지 말어. 우리 천국에서 다시 만나!”


그러자 어머니는 희미하게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어머니 손을 잡고 “어머니, 천국 가시면 목사님 위해, 우리 가족들 위해 기도 많이 해 주세요”라고 말하자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을 떼기 어려워 말은 하지 못하셨으나 가족들의 말에 고개로 답하셨다.


아름다운 마지막, 영복의 시작

2월 1일 목요일 저녁, 남편은 어머니 곁에 누워 어머니 손을 꼭 잡고 잠을 청했다. 나 또한 새벽녘에 일어나 구역예배 때 섬길 음식을 다듬어 놓고 어머님 곁에 누워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딸 유정이가 출근하면서 우리 셋이 누워 있는 모습을 보며 아름답다고 하는 소리에 잠을 깬 후 딸에게 할머니 유고시에 곧장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런데 잠시 후 남편이 “여보, 엄마가 이상해. 빨리 와 봐”라고 다급히 외쳤다. 어머니를 흔들어 깨웠지만 반응이 없었고 가늘게 뜬 눈과 미소를 머금은 평안한 얼굴만 우리 눈앞에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어머니는 그토록 사모하던 주님 나라에 평안히 가셨다.


어머니는 이 땅에 매인 것 하나 없이 소천하기를 원하셨던 것 같다. 딸과 70년간 쌓아온 마음의 짐을 해소했고, 평생 아들이 주님께 돌아오기를 기도했는데 아들이 믿음생활 잘하겠다고 약속했으니 기쁘고 홀가분하게 소천하셨을 것이다.


어머니에게 1원 한 푼 물려받은 것 없지만 어머니는 우리에게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위대한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주고 가셨다. 백만장자, 억만장자가 부러우랴. 어머니 명의로 된 통장도 그동안 남들 섬기고 전도하느라 ‘0원’인 상태였고, 어머니 사는 동안 사용하신 개인 물품을 정리해 보니 작은 보따리 하나밖에 되지 않았다. 세상에 어떠한 미련 없이 오직 천국만 소망하며 기도와 전도로 사신 나의 어머니. 천국에 계실 어머니에게 내 마음을 전한다.


“어머니는 내가 닮고 싶고, 본받고 싶은 믿음의 선배입니다. 어머니처럼 욕심 없이 오직 하나님 말씀 따라 청렴하게 살고 싶어요. 어머니가 평생 올려 드린 기도 제목이 이루어져 감을 앞으로 저희가 목도하겠지요. 어머니, 정말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나니 사업장 문을 여는 2월이 되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가족의 기도대로 적소적시에 알맞게 인도하셨고 더함도 덜함도 없이 역사하셨다. 오랫동안 나를 인정하지 않고 내 마음의 아픔이던 친정 식구들도 장례식을 계기 삼아 우리 성도들의 훈훈함과 예수 사랑을 체험하며 좋은 인상을 안고 갔다. 모든 일에 내 일처럼 협력해 준 연세가족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시어머님을 위해 기도해 주고 마음써주신 담임목사님과 사모님께도 감사하다. 지금까지 일거수일투족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우리 주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 드린다.



|  박순복 집사(63여전도회)


정리 동해경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83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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