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비화 간증] 반공포로가 하나님의 목자가 되기까지(上)

등록날짜 [ 2024-11-06 14:09:59 ]


<사진설명> 6·25전쟁 당시 인민군에 징집되었다가 반공포로가 된 김창식 목사가 연세중앙교회를 방문해 윤석전 담임목사와 대담을 나누고 있다.


구한말부터 1974년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엑스플로 전도대회에 이르기까지 희귀 사진 700여 장으로 보는 ‘대한민국 근현대사 전시회’가 연세중앙교회 대성전 로비에서 열리고 있다. 대한역사문화원 김재동 목사(하늘교회 담임)가 기획하고 연세중앙교회가 주최한 전시회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과 그 날들’은 한국교회사의 관점에서 본 대한민국 건국 과정을 사진 수백 장과 자세한 설명으로 생생하게 묘사한다.


지난 10월 16일(수) ‘대한민국 근현대사 사진전’과 관련해 6·25전쟁 당시 반공포로였던 김창식 목사가 연세중앙교회를 방문해 윤석전 담임목사와 대담을 나눴다. 올해 94세인 김창식 목사는 황해도 출신이며, 6.25전쟁 당시 인민군으로 징집돼 전장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으나 하나님께서 여러 차례 목숨을 구해 반공포로 석방에 사용하셨다. 이날 대담에서 김창식 목사는 하나님께서 자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살게 하시고 목회자가 되기까지 경험한 개인 간증을 실감나게 전했다. 이 상세 내용을 지면에 소개한다.


인민군 징집 후 살벌한 포로수용소로

내가 아직 학생일 무렵이었다. 황해도에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 우리나라 최초 교회인 소래교회에서 분리 개척된 이도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 신앙을 지켜 왔기에, 주위의 유물론적 공산주의자가 “하나님은 없다”라고 아무리 선동해도 공산주의 유물론에 반감을 품고 자연스럽게 반공 의식을 키워 갔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우리 동네가 공산당의 땅이 되어 버렸다. 그 탓에 약 2년간 무서운 핍박을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겪어야 했다. 아버지가 보위부에 끌려가 고통을 당할 뻔했지만, 다행히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지켜 주셔서 동네 지인에게 도움을 받아 집에 돌아오기도 했다. 아버지가 고초를 겪다가 죽을 수도 있었던 그날, 나는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살고자 하는 소망을 품었다. 그러나 이 소망은 여러 역경을 겪은 다음에야 이루어졌다.


1950년 6월 25일 주일, 북한이 남한을 기습 침공했다. 남침 소식을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 역시 총동원령에 따라 인민군에 징집되었다. 이제 막 스무 살 성인이 되었는데, 내 의사와 상관없이 군인이 되어 전쟁에 나간 것이다.


이후 200명가량이 속한 대대에 배속되어 남한의 경기도 지역까지 내려왔다. 작전을 수행하기 전 적당한 곳에 은신하고 있던 순간, 국군의 전투기가 우리 대대에 갑작스런 폭격을 가했다. 어디든 피해야 했다. 바로 옆에 계곡이 보였는데, 생명이 위험할 만큼 깊고 위험해 보이는 골짜기였다. 그러나 폭격을 피해야 했기에 일단 뛰어들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작은 상처 하나 없이 안전하게 폭격을 피했으나, 내가 있던 대대는 초토화되었고 나만 홀로 살아남았다. 결국 잘 알지도 못하는 남한 땅을 두세 달간 배회하다가 포로로 잡히게 됐다.


그렇게 한 번도 전투에 나서거나 싸우지 않고 1950년 겨울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는데, 내가 간 거제도의 73포로수용소는 공산군 두목들이 주로 수용된 곳이었다. 그 당시 수용소가 얼마나 살벌했던지 저녁 6시에 유엔군 보초병이 퇴근하면 인민군 포로들이 연병장에 가득 모여 공산 구호와 북한 군가를 불렀다. 전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이처럼 많은 포로를 관리하는 것도 어려웠기에 수용소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비무장 군사 집단이 되었다.


죽음 위기에서 하나님이 지켜 주신 은혜

그 당시 밤의 수용소는 아무도 통제할 수 없었다. 포로 집단끼리 싸워 사상자가 발생하면 땅에 파묻거나 각을 떠서 분뇨통에 버리는 등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같았다. 추위와 질병 탓에 하루에도 셀 수 없이 죽어나갔다. 그러나 그토록 무서운 수용소에도 한 줄기 희망이 있었으니 바로 ‘천막 교회’였다. 하나님께서 헤럴드 보켈(Harold Voelkel, 한국 이름 옥호열) 선교사를 군목(軍牧)으로 보내 주셔서 천막 교회에서 복음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나 외에 다른 포로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만나 공산주의를 버리고 자유민주주의를 따르기 시작했다.


<사진설명> 1951년 6월 4일 거제포로수용소 7구역에 설치된 천막교회의 모습(출처 국제적십자위원회).


그러나 친공포로들은 교회 때문에 반공포로가 늘어나는 것을 지켜만 보지 않았다. 호시탐탐 교회를 공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950년 12월 23일 밤, 친공포로가 수용소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쿠데타를 일으켜 반공포로들을 죽이고 텐트 안에 있던 포로들도 몽둥이로 잔혹하게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는 이런 사태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성도 26명(직원 11명과 찬양대원 15명)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킨 이들을 대항해 천막 교회를 지키고 있었다.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보호하심이 있었으니, 친공포로들이 교회를 공격하러 달려가던 순간 유엔군이 이를 발견하고 비상령을 내린 것이다. 교회를 보호할 목적으로 유엔군이 사전에 수용소 정문 근처로 교회를 옮겨 두었기에 친공포로들의 불순한 움직임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친공포로들은 도망하고 천막 교회를 지키던 사람들은 아무런 공격도 당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하나님께 여쭈었다. “왜 나를 살려 주신 겁니까?” 그때 성령님께서 세밀하고 분명하게 감동하셨다. ‘너는 내가 택한 그릇이야. 너를 손톱 하나 다치지 않게 보호하리라. 너 쓰려고!’ 너무도 감사하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다음 날 쿠데타를 일으킨 수감자들을 포함해 친공포로 모두가 다른 수용소로 이감되자, 그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린 천막 교회 목사님들이 연병장에 걸린 인공기를 모두 태극기로 바꿔 달았다.


다음 날 아침, 수용소에 남아 있던 반공포로 1000여 명이 다 함께 성탄절 예배를 드렸다. 목이 멜 만큼 하나님께 감사와 감격의 찬양을 올려 드린 그 날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51년 한 해 동안 천막 교회에서 포로 4만여 명 중 2만여 명이 예수님을 영접했다.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생명 지켜 주셔

포로가 된 지 2년여 후인 1952년 초, 휴전협정 협의 과정에서 포로 교환 문제가 제기되었다. 북한에 억류된 유엔군과 남한에 수감된 인민군 포로 전원을 교환하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북으로 강제 송환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과거 천막 교회를 지킨 청년들이 주도하고 반공포로 수백 명이 동참해 흰 천에 ‘포로 교환 결사 반대’라고 쓴 띠를 이마에 동이고 목소리 높여 외쳤다.



<사진설명> 논산 포로수용소 예배를 마치고 성경책을 들어 올려 사진을 찍는 반공포로들의 모습(출처 호주전쟁기념관)


그러나 효과가 전혀 없자 결국 청년 27명이 보급받은 옷에 혈서를 썼다. “포로 교환 결사 반대”나 “결사 반공”이라는 글을 손가락에서 나오는 피로 썼는데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쓰러지는 이도 있었다. 그만큼 우리는 절박했다. ‘혈서를 쓰다가 죽더라도 최후의 목소리를 외치리.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쓴 혈서를 띠로 엮었다.


이 모습을 본 옥호열 선교사께서 눈물을 흘리면서 ‘포로 교환 결사 반대’ 띠 27개를 거두어 프리스턴대학교 동문이기도 한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해방의 기적을 이루기 시작하셨다. 혈서를 보고 감동한 이승만 대통령이 포로 중에도 기독교인과 우익 세력이 많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되어 반공포로의 석방을 결정한 것이다. 1952년 6월까지 2개월에 걸쳐 반공포로와 친공포로가 분리되어 격리 보호 조치되었고, 6월 18일 밤에는 대통령이 한국군에 비밀 지령을 내려 전국 수용소 철망에 구멍을 뚫어 반공포로 2만 7000명이 석방되었다. 이 사건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차후에 알았지만,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이 이 대통령을 찾아와 “누구의 명으로 이런 일을 했는가”라고 항의했을 때 “하나님이 시켜서”라고 대꾸하자 씁쓸하게 돌아갔단다.



<사진설명> 옥호열 선교사가 1952년 논산 포로수용소에서 찬송가를 지휘하고 있는 모습(출처 호주전쟁기념관).


그런데 그 당시 나는 수용소를 탈출할 수 없었다. 먼저, 철조망 구멍으로 몰려드는 포로들을 뚫고 들어갈 수 없었다. 뒤를 돌아보니 가시 철망을 기어오르는 이들이 있었다. 나도 철망으로 갔으나 손에 들고 있는 성경책을 버릴 수 없었다. 성경책을 버리고 두 손으로 가시철망을 붙들고 올라가면 탈출할 수 있었지만 신앙 양심상 그럴 수 없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의 감동이었는지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눅17:33)라는 말씀이 생각났다. 성경책을 버리고 갈 수 없어 결국 탈출을 포기하고 만 것이다. 이때도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해 주신 것을 나중에 깨달았는데, 포로 법에 따라 철망을 타고 탈출하는 이들에게 유엔군이 총을 난사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철망을 타고 넘어갔다가 다리에 총알이 관통해 의족을 한 전우가 알려 주었다. 지금도 당시 성경책을 가보로 간직하고 있고, 자녀들에게 “이 성경책이 너희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것이니 예수를 잘 믿어라”라고 당부한다.


결국 나는 휴전 협정이 성사되어서 판문점까지 이송되었다가, 남한에 남고자 한다는 의사를 전달해 남한에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게 되었다. 강제적인 전체 포로 교환에서 자유의사에 따른 포로 교환으로 정책이 바뀌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날이 1954년 1월 24일이었으니, 학생 시절 대한민국에 살고자 하는 소망을 품은 뒤 죽을 고비를 세 차례나 넘기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은 다음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 삼아 나는 수많은 죄인을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에 결정적으로 눈을 떴다. 올해 94세인 현재까지도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주제 삼아 평생 말씀을 연구하고 십자가 보혈의 진리를 전하며 살아가고 있다. <계속>




<사진설명> 대한민국 근현대사 전시회를 관람하는 김창식 목사. 반공포로 관련 전시물 앞에서 “6·25전쟁 당시 혈서를 쓰고 왼팔에 ‘결사반공’이라는 문신을 새기면서까지 자유를 호소했다”라고 고백했다.



위 글은 교회신문 <87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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