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도 막을 수 없었던 복음 전도의 여정
러시아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개척지로 향하던 중 보시엘해 모커우 지점에서 풍랑으로 인해 순교했던 박노기 목사. 21세의 젊은 나이로 입교, 36세까지 온 젊음을 오로지 전도에만 힘썼던 그는 인자함과 겸손함의 덕행을 겸비한 목회자였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순회 목사로 경상도 등 전국의 교회를 돌며 성도들을 돌보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충성을 다했다.
박노기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겸손을 배우고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이었다. 민족의 아픔으로 여기면서 복음만이 이 민족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주의 종이 되어 평생 주님의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다.
유교에서 기독교로
박노기 목사는 대대로 이어오던 전통적인 유교 가정에서 태어나 유교의 전통적인 경전인 한문을 어렸을 때부터 배웠다. 한학을 공부한 박노기가 20세가 되었을 때는 지덕을 겸비한 젊은 선비가 되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기독교인을 만나 복음을 듣게 되었다. 새로운 진리에 호기심을 많이 가지고 있던 차에 새로운 복음을 듣게 된 박노기는 교회에 다니게 되었고, 얼마 안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슴에 깊이 간직하고 그리스도의 진리를 공부하였다. 박노기는 자신의 삶속에 기쁨이 넘쳐 흐르는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체험하였다.
목회자로 헌신하기 위해 오랫동안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했다. 그리고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하나님께 맡기고 주님을 따라 나선 신앙의 선배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박노기는 주님께 일생을 드리기로 결단하고 주님의 일군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인자하고 겸손한 그의 성품
박노기 목사는 초창기 개척자의 역할을 휼륭히 하면서 초석을 든든히 해놓은 목회자이다.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하던 초창기에 전국을 돌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전국 곳곳에 교회를 세우면서 침례 교회의 지경을 넓혔던 그의 공로는 침례 교회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높은 학문과 오랜 경륜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흠모하는 덕이었다. 이러한 휼륭한 품격은 이웃에게 본이 되어 박노기 목사가 전하는 복음에 힘을 실어 주었다. 산 넘고 들을 건너 복음을 가지고 낯선 마을에 들어가면 그의 인품에 매료된 많은 사람이 복음의 진실함에 빠져 교회로 들어왔다. 마을 사람들 중 몇 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사랑방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교회가 세워졌다.
해상에서 순교한 박 목사
1918년 박노기 목사는 김희서 교사와 전영태 총찰, 최응선 감로와 함께 러시아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이들을 수행하는 제직들과 함께 러시아 수청과 연추지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배를 탔다. 이들이 탄 배는 러시아를 향해 항해했다. 순풍이 불어 순조롭게 항해하던 배가 보시엘해 모커우 해역에 들어가자 풍랑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유라굴로의 풍랑처럼 몰아쳐온 파도는 배를 순식간에 집어 삼켰다. 배는 산산이 부서지고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파도 속으로 묻혀 버렸다.
배를 타고 항해하던 선교사들은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풍랑에 휩쓸렸다. 광풍에 휩싸인 바다는 배와 함께 선교사들을 바다에 잠기게 만들었다. 초대 교회 순교자들의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계에 전하는 힘이 되었던 것처럼 넓은 바다에서 순교한 이들은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해지는 데 큰 능력으로 지금도 모든 교회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이 순교소식이 러시아 지방에 알려지자 “러시아의 거주민들을 위해서 전도하러 오다가 희생되었으니 우리들도 기독교인이 되어서 그들의 순교의 희생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자”면서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전한다. 당시 그곳 여론에서는 “네 명의 선교사가 힘써서 전도했더라도 이처럼 많은 교인을 얻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들의 순교를 헛되게 하지 않았다..
/ 자료출처 <한국침례교인물사> (김갑수, 요단출판사)
위 글은 교회신문 <14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