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의 파도와 함께 본 교단의 제5대 감목으로 취임한 이종근 목사. 그는 신앙의 의지로 전쟁의 거센 풍랑에서 키를 움켜쥐고 본 교단을 이끌어 오는 데 사력을 다했다. 결국 자신은 물론 침례교단의 33인의 지도자들이 옥고를 치러야만 했고 그로 인해 한국 교회사에 찬란한 순교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
원산 사건과 이 목사
침례교단에도 그릇된 감정을 품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일제의 앞잡이로 나서서 교단에 압력을 가하는 데 일조를 했다. 그러나 교회는 박해가 심하면 심할수록 더 강해졌다.
1941년 원산 총부에 우태호가 찾아왔다. 미국의 침례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며 침례교단에서 교역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감목이었던 이종근 목사를 비롯한 교단측 교역자들이 신원이 확실하지 않은 사람을 허락할 수 없어 거절했다.
그러자 그는 교단에서 사용하는 신약성경과 복음찬미가(찬송가) 한 권씩을 가지고 서울로 갔다. 이후 장로교회 출판권을 가지고 있는 오문환과 공모하여 총독부 경무국에 신약성경과 복음찬미를 불온문서로 신고하였다. 일본 경찰은 교단을 해체할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경찰을 보내 총부에 보관하고 있던 성경 6,500부와 복음찬미가 등 문서 일체를 압수했다.
그후 이들은 여러 방면으로 수사망을 가동하여 침례교단을 훼파하기 위한 단서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복음찬미 가사에 써 있는 예수님 보혈과 강림에 대해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이러한 친일파의 고발로 인해 침례교단이 받은 박해는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정도였다. 결국 1942년 6월 10일 원산의 일본 헌병대는 총부를 재수색하는 동시에 이종근 감목을 구속하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억압과 심문을 감행했다. 그들의 심문의 내용을 몇 가지 살펴보자.
〈문〉일본 천황폐하도 불신시에는 멸망하는가?
〈답〉성경에 그렇게 명기되어 있다.
〈문〉그 때는 일본도 망하고 천황도 예수 통치하에 들어가는가?
〈답〉전 세계가 통일되는 동시에 예수님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다.
〈문〉단체 대표인 감목이 그렇게 답변할 때는 간부는 물론이고 전 교단의 지도자들은 동일한 신조로 지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답〉동일한 성경으로 동일한 신앙을 소유하는 것이 합치되는 이론일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평소에도 의지가 굳기로 소문난 이 감목은 성경 말씀을 근거로 추호도 동요 없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이 감목의 답변은 잘못된 것이 없었지만 이들은 더 크게 격분했다. 다음 날 일본인들은 전국의 교단 지도자들은 물론 교역자들을 체포하였다.
교단 해체령
1944년 5월 10일 동아기독교 해체령이 함흥재판소 법정으로부터 내려졌다. 이를 시작으로 전국의 교회에서 일본 경찰의 핍박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집회 금지는 물론 교회를 말살시키기 위해 교회 건물을 팔아 전쟁기금으로 사용하려 하였다. 전국 지방 교회마다 목자를 잃고 예배당을 빼앗긴 교우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였다. 그러나 신앙심이 불타는 성도들이 교인들의 집에 모여 주일에 예배를 드렸으며 여전히 순회전도자들은 전국을 돌며 복음을 전했다.
순교의 각오로 산 일생
이종근 목사는 3년여의 옥중생활을 마치고 출옥했다. 옥에 갇혀 있을 때도 자신의 안위보다는 동료들을 염려해 이들이 속히 출감하도록 힘썼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문을 모두 받으면서도 동료들을 생각하는 그의 마음은 동료 목회자들을 감동시켰다.
감옥에서 나온 이 감목은 만주지방 간도로 이사를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공산당들의 핍박을 피할 길이 없었다. 공산당들이 교회로 찾아와 이 감목을 천장에 매달아 놓고 몽둥이로 마구 때리자 급기야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런 그를 죽은 줄로 알고 동구 밖에 버렸는데 얼마 후에 깨어났다.
이종근 목사는 부득이 국경을 넘어 다시 종성동으로 이사를 했지만 38선이 갈라지면서 소식이 끊겼다. 그 후의 일은 알 수 없으나 그의 동생인 이종수 씨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 공산당들에게 계속 고통을 받다가 순교했을 것이라고 했다.
/ 자료출처 <한국침례교인물사> (김갑수, 요단출판사)
위 글은 교회신문 <145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