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침례교 역사 속 믿음의 인물들 9

등록날짜 [ 2008-12-16 11:51:55 ]

전도에 불타는 장석천 목사의 설교는 밤하늘에 울려 퍼졌고, 그의 노상 설교를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의 설교에 은혜 받은 무리들은 그를 가마로 모셔가곤 했다. 장기영 감로의 아들로 태어나 17살에 스태드만 선교사에게 침례를 받고 공주 성경학교에서 수학한 그는 일생을 오직 전도에만 힘썼다.
장 목사는 아버지 장기영 감로의 가르침과 성경 말씀을 따라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하여 신앙인의 본이 됐다. 가을이면 추수한 곡물이 매우 많았는데, 장석천 목사는 이를 꼼꼼히 계산하여 철저하게 십일조를 교회에 드렸다. 또한 교회의 성물을 관리하는 직분을 맡아 성물을 철저하게 관리했다. 예를 들면 주일 헌금은 꺼낼 수 없게 된 함에 넣고는 교회 일이나 하나님의 사역에 필요한 일 외에는 절대로 꺼내지 못하게 했다. 모든 일에 철두철미했던 장 목사는 신중하고 의롭고 거룩한 삶의 모범이 되고자 자신이 한 말은 행동으로 옮겼고 맡은 일에도 성실하고 진실되게 했다.


전도활동

총회에서는 장석천 목사를 영동과 옥천 지방 그리고 경상도와 함경도 지방을 순회하며 전도하도록 파송했다. 그가 마을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면 얼마 되지 않아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생겼으며, 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함께 전도했다. 차츰 더 많은 사람이 교회로 모여 예배하며 합심하여 기도하였고 자연스럽게 그 마을에 교회가 세워졌다. 이것은 성령께서 함께하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놀라운 일이었다. 이렇게 시작한 교회는 전국 곳곳에 많이 세워졌다.

건강악화와 겹친 일제탄압

1931년 칠산교회 담임목사로 있을 때 전국을 순회하는 전도 집회를 너무 무리하게 강행하면서 병이 들었다. 겨울이면 몸을 움직이지 못해 병석에 누워서 보냈고 여름이 되면 겨우 일어나 교회 일을 돌볼 수 있을 정도로 쇠약했다. 그 후 일본은 한민족 말살정책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이를 거부하는 교회는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1942년 9월 7일 원산사건이 일어났다. 일제가 발효한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장 목사를 비롯한 침례교단 지도자 32인이 감옥에 갇혔다. 2년 동안 감옥에서 고문을 받았고, 3년 7개월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선교부 초청에 공을 세운 장 목사

1945년 8월 15일 조국해방의 소식이 울려 퍼지자 온 국민은 태극기를 휘날리며 감격과 환희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뿐이었다. 사회는 또다시 혼란스러웠다. 정당과 사회단체가 난립했고, 공산주의자까지 혼란을 부추겼다. 결국 미·소 양국은 38선을 긋고 우리나라를 남북으로 나누었다. 이때 남과 북에 있는 교회도 자연스럽게 분리되어 서로 만날 수 없게 되었다. 북에 있는 침례교회들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우리 교단의 관계자들은 일제의 압박 속에서 폐쇄되었던 교단을 다시 세우기 위해 모든 교인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일했다. 남한에 있는 교회를 수습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고 교회의 발전과 부흥을 위해 장기적인 계획을 세웠다. 장 목사는 교단의 장래를 위해 외국 선교부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당시 미국 남침례교 선교부와 제휴하기 위해 한기춘 목사와 함께 힘썼다. 이들의 숨은 노력이 결실을 맺어 염원하던 선교부의 초청이 실현되었다. 이때 내한한 선교사와 만나 제휴관계를 성취하였다. 이러한 일을 하던 중 장석천 목사는 1949년 9월 2일 갑자기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미망인과 독자 장일수 목사를 남겨놓고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 자료출처 <한국침례교인물사> (김갑수, 요단출판사)

위 글은 교회신문 <14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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