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침례교 역사 속 믿음의 인물들 10

등록날짜 [ 2009-03-20 14:11:53 ]

열성적인 복음 전도

김재형(金在衡) 목사는 1882년 충청북도 단양군 가칠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두뇌가 명석하였고 특히 기억력이 뛰어났다. 25세 되던 1906년 순회 전도인에게 복음을 듣고 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했다. 특히 복음 전도에 있어서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동리 사람들과 이웃 마을은 물론 먼 고장에까지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이렇게 열성적으로 복음을 전하자 교단에서도 그를 인정하여 그는 1907년 총부로부터 전도인의 직분을 받았다. 그해 충남 부여군 칠산 교회에서 김경춘과 함께 경흥지방으로 파송을 받아 그 지역을 전도하는 중책을 맡았다. 이에 김재형은 더욱 열성적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이곳에서 많은 열매를 맺었으며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 때 주님의 품으로 돌아온 교인들 중 박성봉, 한봉관, 박성은 등은 본 교단의 충성스런 목회자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복음을 위해 봉사했다. 이후 간도로 파송되어 이곳에서도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했다.


신앙의 정절을 지키다

10여 년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한편으로 성경을 열심히 연구했다. 3.1운동이 일어나던 해인 1919년 백남조, 김영진 등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42년 일제에 의한 신사참배가 조직적으로 전국에서 행해졌다. 신앙인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당시 많은 교단의 모든 교회는 이를 강력히 거부했다. 일제의 탄압은 세계적으로 악명 높을 만큼 혹독하고 무서웠다. 그러나 침례교회를 이끌고 있던 김 목사를 비롯한 지도자들은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믿음의 숭고한 뜻을 저버리지 않고 지켰다.
1944년 5월, 만 2년 동안 감옥에서의 잦은 고문과 협박 속에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이들을 일제는 굴복시키지 못하고 감옥에서 풀어주었다. 감옥에서 나온 김 목사는 여전히 교회를 돌보고 하나님의 복음을 널리 전했다. 오히려 감옥에 갇히기 전보다 더 힘 있게 일했다. 주의 종으로 평생 동안 교회에서 충성하면서 후진들에게 부끄러움 없는 목회자로서 모범을 보였다.
김재형 목사의 전도를 받고 믿음을 가진 이들 중에 많은 이들이 순교를 당했다. 또한 김 목사를 통해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고 교단을 지킨 지도자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말씀 위에 세워진 교회

본 교단의 창설자인 펜윅 선교사는 전국의 교인들에게 성경을 많이 읽도록 권장했다. 각 교회마다 성경 읽기 운동이 불같이 일어났다. 농한기인 겨울은 성경을 읽기에 안성맞춤이어서 교인들이 성경을 많이 읽었다. 성경을 수십독, 수백독한 교인들이 부지기수였다. 자연스럽게 교인들이 모이면 성경 이야기가 꽃을 피웠다. 김재형 목사와 김용제 목사 형제는 성경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목사로 알려져 있는데, 동생 김용제 목사는 성경을 거의 암송하다시피 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성경을 많이 배우고 익히는 운동을 통해 교인들은 이상적이면서도 성경적인 신앙인으로 자랐다.
오늘날 한국에서 침례교회가 건재한 것은 복음이 들어오던 초창기부터 주님의 말씀 위에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선배들의 노고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새로운 사조들과, 성경을 다르게 해석하는 많은 자유신학이 범람하는 현대사회에서 교단이 발전하고 반석 위에 선 굳건한 믿음으로 나아가기 위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자료출처 <한국침례교인물사> (김갑수, 요단출판사)

위 글은 교회신문 <154호> 기사입니다.

    아이디 로그인

    아이디 회원가입을 하시겠습니까?
    회원가입 바로가기

    아이디/비번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