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교단이 낳은 대부흥 강사인 한봉관 목사는 그의 나이 54세 때 순교하였다. 그가 인도하는 집회는 언제나 은혜의 도가니였고 그 힘은 만주, 시베리아 지역의 당당한 개척자로서 뻗어나갔다.
한봉관 목사는 1919년 3·1운동이 나던 해에 경흥과 중성 그리고 해삼위 지방으로 순회 목회를 했다. 순회목회는 고행 그 자체였다. 그 당시에는 교통수단이 발전되어 있지 않았다. 형편이 나은 목회자들은 자전거를 타고 다녔으나 자전거를 가진 목회자는 전국에 몇 명밖에 되지 않았다. 순전히 걸어서 수십 리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을 돌보아야 했다. 일주일 동안 수백 리를 걸어야만 모든 교회를 돌볼 수가 있었다. 이렇게 수백 리를 걸어 다니며 교회를 돌아보고 집에 오면 발은 퉁퉁 부르텄고 온몸은 녹초가 되기 십상이었다.
1924년에는 간도지방에서 시베리아와 노령지역으로 목회지를 옮겼다. 그는 마을을 돌며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교회가 세워졌다. 당시 이 지역에 3백여 교회가 들어섰다고 전하는데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부흥이었다. 성령께서 강하게 일하시던 초대교회의 능력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1942년 해방을 불과 3년 남겨 놓고 회령 교회에서 사경회(부흥회)를 인도하던 중 쌓인 피로를 못 이기고 쓰러졌다. 급기야 방으로 옮겨 의원을 불렀지만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순교하였다. 그가 몇 달만 생명이 연장되었더라면 교단의 임원들과 같이 형무소에 투옥되었을 것이다. 슬하에 미망인과 2남 2녀를 남겨 놓은 채, 54세의 일기로 주님 나라에 부름을 받았다. 그의 생애는 길지는 않았지만 한국 교회에 그가 남긴 믿음의 향기는 그윽하고 깊었다. 또한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한 믿음의 선진이었다.
부흥사로 크게 활약했던 한 목사
1917년 종성동 교회에서 개최되었던 12회 대화회에서 전도생활 10년 만에 노재천 목사와 함께 목사 안수를 받은 한봉관 목사는 침례 교단이 낳은 휼륭한 부흥강사였다. 평소의 인자한 성품이 그대로 묻어나는 설교말씀은 꾸밈없이 성도들에게 전달되었다. 더구나 성경의 오묘한 진리를 깨우치는 말씀들은 누구든지 한 번 들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의 깊이 있는 설교는 그 당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탁월했다.
자연히 그의 설교는 전국에 있는 모든 교회에 소문에 소문을 몰고 퍼져 나갔고 집회는 초만원을 이루었다. 인근에 있는 교인들은 물론 인근 마을 사람들도 큰 관심을 가지고 부흥회에 참여했다. 집회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눈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앙인으로 거듭났다. 이처럼 말씀을 증거하는 특별한 은사를 받은 한 목사는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전국 교회에 부흥회 일정이 빼곡히 잡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담당한 지역의 교회를 돌보는 등 쉴 틈이 없었다.
수난 교회 구호에 공헌
한봉관 목사는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에서 일했다. 부흥회를 인도하는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개종했기 때문에 많은 교회가 개척되었다. 그러나 그곳이 공산화되면서 복음을 사수하던 그리스도인 대부분이 희생되었고, 때론 믿음을 버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지금도 지하 교회에서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고 전해진다.
한봉관 목사는 양을 사랑하는 목자의 심정으로 교회를 돌보았다고 증언했다. 1927년 시베리아에는 만주 등지에서 공산당원 등을 동원해 방화와 살인을 일삼았다. 그곳 주민들은 늘 불안하고 초조한 시간을 보냈으며 안심하고 살 수가 없어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로 내려왔다.
원산 총부에서는 한 목사의 보고서를 면밀히 검토하고 곧 전국 교회에 광고하는 동시에 본격적인 구호운동을 전개하여 이들에게 따뜻한 월동 대책을 세워주었다. 온 교우들이 내 것 네 것을 따로 생각하지 않고 필요한 모든 재산을 교회로 가져와 함께 나누었다. 이때 초대교회의 유무상통의 역사가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나라에 하나님의 복음이 뿌리 내리는 데 큰 힘 이 되었다. 한봉관 목사는 깔끔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매사를 빈틈없이 계획하고 준비하여 실수가 없었다. 선배들에 대해서는 언제나 겸손하고 깍듯했으며 후배들에게는 아낌없이 후원함으로 교단의 모든 교역자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 자료출처 <한국침례교인물사> 김갑수, 요단출판사
위 글은 교회신문 <16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