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신감발로 32년 동안이나 복음사역의 선두에 선 강요한나 전도부인에게 예산 광시 청양 홍성 광천 공주 강경 익산 송천 함라 나포 등은 그녀의 발길이 매년 닿던 곳이었다. 전도의 사명을 받은 강요한나는 하루도 쉬지 않고 인근 마을은 물론 발길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지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데 온 힘을 다했다. 그래서 강 전도부인은 ‘극성스런 예수쟁이 아줌마’ 또는 ‘할렐루야 할머니’로 불렸는데 우리나라 최초로 ‘할렐루야 할머니’라는 별명을 얻은 여인이다. 교단 대표 32인의 구속에 충격을 받고, 하늘나라로 간 강 전도부인의 전도 행적은 초기 기독교사에 핀 한 송이 백합화다.
강요한나 입교 동기
강요한나 여전도인은 1886년 7월 6일 충남 홍성군 장곡면 화계리에서 강영한 씨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18세 되던 1904년 결혼하여 1남 2녀를 두고 행복한 가정을 꾸미며 살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18년 하늘처럼 믿고 살던 남편이 갑자기 죽자 그 비통함을 달랠 길이 없어 오송산 대법사라는 절을 찾아 불공을 드리는 것으로 삶의 위안을 삼게 되었다.
이같이 희망 없는 생활을 반복하던 어느 날 산에서 내려오는데 낯선 청년이 ‘만민 좋은 기별’이라는 잡지를 건네면서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가정도 나라도 구원을 받게 됩니다”라는 말을 하자 강 여인으로서는 난생처음 듣는 말이었으며 영영 죽지 않는다는 말이 가슴에 깊이 박혔다. 그러나 그 청년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와서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를 어떻게 믿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마침 전치규 목사가 그 지역에 순회전도를 하기 위해 찾아왔다. 이 소식을 들은 그녀는 그를 찾아가서 교회에 다니게 되었고 믿음을 가진 교인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과 함께 1919년부터 교회에 출석하면서 주일예배와 수요일 기도회를 드리게 되었다.
초대 여전도인으로 활약한 강 여사
이때 일제는 종교포교 규칙을 공포하고 종교단체들을 법으로 규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침례교단은 날로 부흥하여 1923년 충남 강경에서 대화회를 성황리에 개최하였고 이 대화회에 참석한 강요한나는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를 받게 된 후 자기 집에 교회를 설립하고 박기양 교사를 초빙하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내 생애는 새로 시작되었다”고 간증하면서 전도하는 강요한나의 삶은 기쁨과 감사뿐이었다. 불길처럼 타오르는 신앙의 열기를 몸소 체험하고 다른 교인에게 모범이 될 뿐만 아니라 삶에도 큰 변화를 받게 되었다. 1924년 전국의 교회와 가정에서 간증하면서 전도하는 일이 자신이 받은 사명임을 밝히고 평생 전도인으 로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강 전도인은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혼자 걸어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 발길이 닿는 동네마다 교인들이 생겼고 교회가 설립되었다. 강 전도인은 교단에서 ‘복음심방값’이란 명목으로 현금 5원과 5원치 전도용 책자 등 10원을 지급받았다. 전도인들이 전도비 10원을 받으면 먼저 짚신감발(양말이 없었으므로 무명옷감을 발에 감고 신을 신는 것)을 하고 배낭을 메고 집을 떠나 5일 또는 일주일, 길면 2주일씩 전도여행을 했다. 끝나면 집에 돌아와서 2~3일 쉬고 또다시 전도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1942년 6월 10일 원산 헌병대에 의해 본 교단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9월 4일부터 용안과 송천에서 김용해 목사와 이상필 감로가 구속을 당하고, 교회 재산은 ‘국방 헌납’이란 명분으로 탈취당하자 강 전도인은 이때 크게 충격을 받아 병석에 누웠다. 오로지 교회를 섬기는 일과 전도하는 일에 온 생애를 보냈던 그녀는 해방을 불과 2년여 남겨두고 1943년 주님 품에 안겼다.
충성을 다했던 강 전도인은 뒤돌아볼 줄 모르고 앞만 보고 달려갔던 충성된 전도인이었다. 그녀가 평소 가족에게 철칙으로 교훈시킨 한 가지는 “주님의 종들을 받들어 섬기는 것을 기쁨으로 알라. 그리고 가난한 사람을 접대하는 것을 축복으로 알라. 그러면 천국에서 상급이 기다릴 것이다”였다. 후손으로는 김순갑 목사와 증손자 종걸 교수(신학대학)와 증손 의룡 목사가 있다.
/ 자료출처 <한국침례교인물사> 김갑수, 요단출판사
위 글은 교회신문 <16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