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교 믿음의 사람들 14

등록날짜 [ 2009-07-28 16:12:17 ]

전병무(展炳武) 목사는 강원도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에서 1888년 4월 21일 전내석 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공부했다. 머리가 명석한 전병무는 하나를 배우면 셋을 아는 수제자로서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공부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르는 한자가 없었다. 그래서 학동들 사이에서 ‘옥편’이라는 별명을 들었다.
1909년 2월 22세 되던 해에 어느 전도인에게 복음을 듣고 교회에 출석하였다. 성경을 읽고 목사의 설교 말씀을 가슴에 깊이 간직하고 삶속에서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교회생활도 성실했던 전병무는 성별된 신앙인으로 교인들의 모범이 되었다. 29세 되던 1916년 순교자 전치규 목사의 형님이 되는 전치현 씨의 주선으로 함경도 원산의 펜윅 선교사가 열고 있던 성경공부 반에 들어갔다. 모든 일에 성실했던 전병무는 성경공부에도 최선을 다했다. 얼마나 열심히 성경을 공부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성경 옥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목회생활 및 정신

전병무 목사는 목회현장에서 헐벗고 굶주린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오랫동안 전쟁을 겪고 일제의 무자비한 압제와 탄압에 지친 민중들은 삶의 소망을 잃은 지 오래였다.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먹고 사는 문제였다. 그래서 교단에서도 민중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기 위해 여러 가지로 힘쓰고 있었다.
이들에게 기쁨의 소식을 전하는 것은 삶의 희망을 북돋아 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민중들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을 일깨워 주었다. 특히 천국에 대한 주님의 말씀은 더없이 큰 소망이요, 삶의 목적이었다. 전병무 목사도 천국에 대한 남다른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고향 교회를 건축할 때 건축비 전액을 헌금하였는데 “천국에다 예치시키는 것이다”라며 조용히 웃었다.
일제의 교회 탄압은 날로 더해갔다. 교회는 견디기 어려운 핍박에 예루살렘을 버리고 세계로 흩어졌던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고향을 버리고 간도와 만주로 이민을 떠나곤 했다. 전병무 가족들도 만주로 이민을 가자고 결정하고 장남인 전부흥이 함께 가자고 권했다. 그러나 전 목사는 교회를 떠날 수 없다며 남았다. 모든 교우들이 만주로 피신시키려고 애를 썼지만 끝내 듣지 않고 가족들과 이별을 하면서도 혼자서 교회를 지켰다. 그러던 1942년 6월 교단 대표 32명이 원산 감옥에서 구속되었을 때 함께 투옥되어 만 2년 동안 감옥에서 살았다.
1944년 5월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몰골로 출감했다. 말할 수 없이 악화된 건강을 돌볼 겨를도 없이 폐허가 된 교회당을 정리하는 데 온힘을 쏟았다. 먹을 것이 없어 산에 들어가 풀을 캐서 목숨을 연장하며 극도로 힘든 생활을 하다가 15개월 만에 광복을 맞이했다.

순교의 제물이 된 전 목사

광복을 맞이한 조국은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갑자기 찾아온 광복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이러한 사회와 사람들에게 제자리를 찾아 주어야 하는 건 교회밖에 없었기 때문에 목회자의 사명이 어느 때보다 컸고 할 일은 많았다.
사회는 물론 교회까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36년간 잃었던 나라를 되찾은 해방의 기쁨에 들떠 있던 민중들은 우익과 좌익의 정치적인 이념싸움에 희생되었다. 1947년 충남 공주에서 개최된 제37회 총회에서 전병무 감로의 목사 안수 안건은 반대하는 사람들 때문에 부결되었다. 그러나 본인은 조금도 불만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 뒤 1949년 39회 총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울릉도, 울진 두 구역으로 파송되어 성실하게 교회를 섬겼다.
당시 울진은 공산당의 활동 본거지였다. 이들은 전 목사를 저격 대상으로 삼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러한 소문을 들은 교인들이 전 목사를 피신시키려 하였지만 개념치 않고 자신이 맡은 목회 구역에 있는 교회들을 위해 충성을 다했다.
1949년 10월이 거의 다가고 있을 때 울진 행곡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다. 저녁예배 때 성경을 봉독하고 있는데 빨치산들이 돌연 방문을 열고 들어와 전병무 목사의 손을 묶고 끌고 나갔다. 이들은 원산 투옥사건으로 순교했던 남규백 감로의 아들이 살고 있던 남석천 형제의 집에서 형제와 함께 전 목사를 총살했다.
이때 전병무 목사는 62세였고 남석천 형제는 26세였다. 이들의 순교정신은 동해 바다가 바라보이는 곳에 세워진 행곡교회에 지금도 남아 있다. 이 교회는 동해안의 예루살렘 교회로 불리며 이들의 순교적 믿음을 기리고 있다.

/ 자료출처 <한국침례교인물사> 김갑수, 요단출판사

위 글은 교회신문 <16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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