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독한 일제치하에서 조국 해방의 기쁨을 찾았으나 38선이란 두꺼운 장막이 가로 놓여 남한의 교회라도 한데 뭉쳐야 한다고 동분서주하던 노재천 목사. 임시 대리 감목직을 맡고 교단 수습과 발전에 전력을 쏟은 그는 20세의 젊은 나이로 본 교단 부흥발전을 위해 헌신한 강직하면서도 온유한 목회자다. 노재천 목사는 약속 시간을 어긴 적이 없다고 한다. 이처럼 철두철미한 그의 삶은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였다.
1908년 그의 나이 20세가 되던 해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어떤 일이든지 한번 시작하면 열과 성을 다했다. 이렇게 열심히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노재천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전도의 사명을 받고 전도인이 되었다. 1915년 교사 직분을 받고 경상남도 진주 지방으로 파송받아 이곳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다. 1917년 목사 안수를 받고 순회 목사로 파송되었다. 노재천 목사는 불의와 타협할 줄 몰랐으며 이웃을 아낌없는 사랑의 손길로 돌보았다. 이러한 그의 아름다운 삶은 곧 교단의 모든 교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교단의 교인들과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유능하고 휼륭한 목회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서간도 전도기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노재천 전도인은 만주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도록 파송되었다. 봉천성, 임강현, 통화현 그리고 집안현의 넓은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노재천 전도인은 추위와 허기로 얼굴이 퉁퉁 부었고 가져간 식량이 떨어져 며칠을 굶으며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만주의 벌판을 걸었다. ‘죽음이 이렇게 오는구나’ 하는 깊은 공포감에 사로잡혔지만 찬송을 부르고 간절히 기도했다. 눈보라 때문에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아 안경을 꺼내려고 봇짐 안에 손을 넣고 찾았다. 떡덩이를 본 일행은 깜깜하고 깊은 산중이었지만 주님이 옆에 계심을 느끼자 힘이 솟고 용기가 충전하였다. 딱딱하게 굳은 떡이었지만 나누어 먹고 흰눈으로 갈증을 풀고 힘을 얻어 산을 넘기 시작했다.
이때 고향에서는 부인이 삯바느질도 하고 이웃집 빨래도 도맡아 했지만 생활은 늘 곤궁했다. 거기다 일제는 목회자의 가정이란 명목으로 핍박을 일삼았다. 어린 자녀를 기르는 젊은 부인은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눈이 수북이 덮힌 산을 헤매야 했고,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구걸도 해야 했다. 이러한 고난과 역경을 헤치고 믿음을 지킨 신앙의 선조들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의 거리와 마을에는 십자가가 서 있고 주일이면 전국 방방곡곡에서 찬양이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옥중생활
1942년 9월 5일 노재천 목사는 결박된 채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일제는 기독교인들을 사상범이라는 죄명을 씌워 중죄인으로 다루었다. 노재천 목사도 예심을 받을 때까지 매일 무서운 고문을 받았다. 살이 터지고 사지가 찢어지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1943년 5월 15일 처음 재판을 받기로 되어 있었지만 재판이 연기되면서 계속해서 감옥에서 지내야 했다.
경상북도 점촌에 살고 있던 아들 노한성은 함흥까지 면회를 신청하였는데 일본 경관에게 이유없이 구타당하기 시작했다. 얼굴과 온몸은 심한 상처를 입었지만 아버지를 면회하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끈질기게 버틴 결과 면회가 허락되었다. 1944년 2월 15일 함흥 형무소에서 병보석으로 나온 노 목사는 몰골이 유령처럼 변해서 알아 볼수조차 없었다. “나는 예수를 모른다”는 말 한 마디를 안 하려고 갖은 고문을 묵묵히 감당했던 것이다.
폴리갑이 예수를 모른다고만 하면 살려 주겠다는 왕의 말에 예수님을 모른다 하지 않고 순교를 당한 것처럼, 노재천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절개를 꿋꿋이 지킴으로 우리에게 올바른 믿음의 길을 가르쳐 주었다.
이후 노재천 목사는 원당교회, 점촌교회, 부산교회 등에서 목회를 하고 76세를 일기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고단한 이 땅에서의 여정을 마치고 주님 품에 고이 잠들었다. 자손들 중에 장손자인 침례신학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노윤백 목사와 증손자 중에 같은 신학대학교에서 사역하고 있는 노은석 교수가 있다.
/ 자료출처 <한국침례교인물사> 김갑수, 요단출판사
위 글은 교회신문 <16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