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교 믿음의 사람들 16

등록날짜 [ 2009-12-01 18:06:01 ]


만주 일대에 그의 발길이 안 닿은 곳이 없다는 박기양 목사. 경북 땅에서 만주 땅 임강현까지 도보로 전도여행을 떠나기까지 그는 오로지 전도를 사명으로 한 열정 있는 전도자였다.
박기양(朴基陽) 목사는 1894년 11월 20일 경북 예천군 예천읍 청북동에서 박규섭 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박기양은 5세가 되던 1899년 서당에 나가 한문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훈장이 가르쳐주는 걸 너무도 잘 따라 읽을 뿐만 아니라 한 가지를 배우면 두세 가지를 깨닫는 그의 자질을 본 훈장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17세가 되던 1911년 임학이 씨의 장녀인 분남 양과 결혼했다.
1911년 결혼을 하고 신혼의 단꿈에 잠겨 있을 시기 충청북도 황간지방에서 파송되어 복음을 전하던 박영호라는 전도인에게 복음을 들었다. 복음을 전해들은 박기양은 무엇에 감전이라도 된 듯 며칠 동안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성령께서 온몸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교회에 출석하게 되자 교회생활에 열과 성을 다했다. 1915년 이종덕 감목으로부터 침례를 받고 그 해 10월에 반장 직분을 받았다.
1917년 2월 사랑하는 가족들을 고향에 두고 신성균, 신용균, 주팔용 등과 함께 고향을 떠나 서울과 원산을 지나 두만강을 건너 만주의 임강현까지 천 여리를 걸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강한 바람이 불어 몹시 추웠고 얼음으로 덮여 있는 30리 길을 걸어가노라면 엄습해 오는 추위를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을 정도였다. 길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다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얼음벌판 속에서 교회를 찾아 그곳에서 몇 년을 보내며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다.
1923년 충청남도 강경에서 개최된 대화회에서 교사 직분을 받았으며 충청남도 예산 구역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인으로 임명되었다. 1924년 10월 25일 경상북도 울진 행곡에서 개최된 대화회에서 김용세, 신성균, 김영관 등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평생을 주님을 위해 헌신했다.
13년 동안 전국은 물론 만주의 간도 구역에서 사역을 시작한 박기양 목사는 그 후 총부에서 개척 사명을 받고 1929년 평안북도 운산 초산 지방에 파송되어 양명길 전도사와 함께 3년 동안 교회를 설립했다.
1941년 경상북도 예천 구역에서 시무하고 있던 박 목사는 경찰의 호출을 받았다. 당시 일제는 침례교단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경찰서에 들어가자 곧바로 감옥에 갇혔고 이후 취조와 고문이 시작되었고 고문을 받다가 의식을 잃었다. 4월 함흥 재판소에서 판결을 받고 감옥에서 생활하다가 만 2년 만인 1944년 2월 15일 보석으로 일시 출옥했다. 그러나 박기양 목사는 모진 고문의 후유증과 영양실조가 겹쳐 몸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졌다. 1945년 8월 15일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다. 일제의 만행에 시달리던 박기양 목사에게는 광명이 아닐 수 없었다. 시무하던 교회는 물론 구역에 있는 교회를 재건하고 예배를 드렸다.
1946년 이후 충남 원당 교회를 시작으로 입포교회, 상주교회, 용담교회를 비롯해 울릉도 평리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헌신했다. 이후 경기도 인천 숭의교회에서 목회했다.
박기양 목사는 한국 침례 교회가 낳은 하나님의 큰 일꾼이었고 전국에 그가 개척한 교회들이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다. 그는 한국 교회의 사도 바울처럼 오직 주의 복음을 전하며 전국 방방곡곡에 그의 발자취를 남겼다.
1979년 4월 11일 향년 86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나라로 가신 박기양 목사는 우리에게 목회자의 올바른 삶의 모습을 보여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차남 은호 목사와 손자 중에는 정의, 정응, 정북, 정근 목사가 있다.

/ 자료출처 <한국침례교인물사>

위 글은 교회신문 <17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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