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성진 목사의 선교史<27>] 복음 확장 과정 속 갈등과 연합

등록날짜 [ 2011-07-06 09:24:54 ]

선교 지역 중복으로 갈등도 있었으나 박해 지역에선 연합해

조선 선교 과정에는 1884년 처음 선교사를 파송한 미국 감리회와 북장로회 외에도 여러 국가의 다양한 교단이 시작부터 함께했다.

영국 성공회는 일찍부터 조선 선교에 관심을 두고 1885년 말엽 중국 복주(福州)에서 사역하던 중국인 사역자 2명을 부산에 파송하였고, 감독관으로 부산지역 선교를 시찰하던 울프(J.H. Wolfe) 주교는 본국에 서한을 보내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선교사를 파송할 것”을 요청한다. 이에 영국 성공회는 해군 군종 출신 코르프(C.J. Corfe)를 책임 선교사로 선교팀 7명을 조직, 1890년 11월 인천에 상륙하여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한다.

또 울프(J.H. Wolfe)가 보낸 서신은 호주에도 전해져 신문에 기사가 실린다. 이를 보고 데이비스(J.H. Davies) 목사와 그의 여동생 메리가 조선 선교를 지원, 빅토리아 장로교회 후원으로 1889년 10월 조선에 도착한다. 그러나 열정보다 육신이 연약한 데이비스 선교사는 1890년 4월 부산으로 이동 중에 그만 병사한다. 데이비스의 안타까운 소식은 호주 장로교단 전체에 조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1891년 매케이(J,H. Mackay)를 포함한 선교사 4명을 추가 파송함으로써 조선 선교에 동참한다.

1892년에는 미 남장로회가 조선 선교를 시작하는데, 1891년 ‘미국신학생 해외선교 연맹’ 집회에서 조선 선교를 담당하던 언더우드와 미국 유학 중인 윤치호 등의 강연을 통해 테이트(L.B. Tate)를 포함한 신학생 6명이 선교를 자원하고, 남장로회가 이들을 파송함으로써 조선 선교에 함께한다.

복음의 선구자인 윤치호는 에모리 대학에 유학하던 중 총장인 캔들러를 만나 수중에 있는 200달러를 맡기며 미 남감리회의 조선 선교사 파송을 요청한다. 민족을 향한 이 눈물겨운 호소로 남감리회는 1896년 리드(C.F. Reid)를 선교사로 파송함으로써  조선 선교를 시작한다.

캐나다의 조선 선교는 1888년 게일(J.S. Gale), 1889년 펜윅(M.C. Fenwick), 1890년 하디(R.A. Hardie) 등 토론토 출신 젊은 선교사들이 개별적인 후원으로 입국하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1893년 캐나다 장로교학교 선교협회 파송으로 입국, 황해도 소래에서 열정적인 사역을 담당하다 1895년에 순교한 매켄지(W.J. Mckenzie) 선교사의 너무도 짧은 선교 여정이 캐나다 동부 지역 교회들에 알려지면서, 1898년부터 캐나다 장로회의 본격적인 조선 선교가 이루어진다.

또 1895년부터는 미 침례교 선교 단체인 ‘엘라 씽 기념 선교회’가 공주, 부산 지역에서 선교 사역을 담당하다가 재정난으로 1901년부터 펜윅 선교사에게 맡기는데, 이것이 오히려 선교를 더 크게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외에도 1907년에는 오늘날 성결교 모체인 동양선교회가, 1908년부터는 구세군이 각각 선교사를 파송함으로써 조선 선교에 동참한다.

이처럼 서구 교회들의 조선 선교는 초기부터 여러 국가의 다양한 교단들이 참여함으로써 상호 경쟁을 통해 단시일 내에 빠르게 확산하는 동력을 얻는다. 그러나 같은 성경 말씀을 전하는 상황인데도 각 교단의 교리적 특징과 이해관계가 강조되고, 한성(서울)을 비롯한 특정 지역에서 교세 확장 경쟁이 과열됨으로써 교단 간 갈등도 곳곳에서 나타난다.

또 선교사 개개인이 추구하는 선교 방향과 성격 차로 선교사 간의 갈등도 생겨난다. 조선 왕실과 가까운 알렌은 의료 선교를 고집하였는데, 직접적인 복음전도와 교육에 힘쓰는 언더우드를 ‘조선 상황도 모르면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으로 헐뜯었고, 언더우드는 이런 알렌의 태도를 ‘선교사로 부적합하면서 선교사들의 대부(代父) 행세를 하는 정치꾼’이라고 비난하는 상황이 된다.

또 알렌은 함께 일하던 헤론(J.W. Heron)과도 갈등한다. 제중원 책임자인 알렌이 기초 의료기술만 익힌 데 비해 헤론은 미국 테네시 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교수와 전문의로 활동할 만큼 실력이 출중하였기에 환자 문제를 놓고 상호 간에 대립하는 일이 빈번히 발생한다.

그러나 조선 땅에서 이들은 분명 선교사였기에 1905년을 전후한 시점부터 각 교단이 합의와 연합을 모색하는 시도가 나타난다. 우선 선교 지역 중복을 피하고자 조선 지역별 분할 협정에 합의하였고, 일부 박해당하는 지역 내에서 연합사역도 진행한다.

조선 개신교의 초기 박해 상황은 정부와 관리들이 의료-교육 선교는 허용하되 직접 전도는 허가할 수 없다는 태도에서 발생하는데, 대표적으로 1894년 평양 감사 탄압을 들 수 있다. 평양 선교는 1893년부터 본격화되는데, 의사인 홀(W.J. Hall)은 평양에 집을 마련하고 의료 사역으로 호응을 얻지만, 마펫(S.A. Moffett)을 비롯한 목사 선교사들은 활동에 제약을 받는다.

이에 전도자 한석진은 직접 20여 명을 전도하고 집을 마련하여 예배를 드리며 선교사들의 사역을 돕는데, 이곳이 훗날 장대현교회가 된다. 이러한 부흥의 물결이 일어나자, ‘188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반외세 성향이 강하던 평양 관청과 주민은 서양인들에 관한 헛된 소문들을 이유로 선교사들을 배척하고 조선 교인들을 투옥한다.

평양 상황이 어렵게 되자 선교사들이 연합하여 각 영사관의 외교적인 힘을 이용, 정부에 항의함으로 마침내 교인들을 석방하게 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시련을 이겨낸 선교사들과 평양 교인들은 이후 더욱 연합하여 교회 부흥을 향해 전진한다. 

위 글은 교회신문 <24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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