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성진 목사의 선교史<28>] 조선 선교의 부흥과 역사적 상황

등록날짜 [ 2011-07-20 14:14:50 ]

평양에 ‘성경공부를 중심으로 하는 사경회’ 성황 이뤄
이때 은혜 받은 이들이 후일 민족의 지도자들로 성장

이 땅에 기독교가 전파되고 선교사들의 사역이 확산하던 19세기말 조선 사회는 근대화에 따른 진통으로 임오군란, 갑신정변, 청일전쟁과 같은 역사의 소용돌이를 온 몸으로 겪어야 했다.

시대 변화를 알지 못한 수구 세력과 마음만 급한 개화 세력 간의 다툼 그리고 시시각각으로 침탈해 오는 외세에 대해 적절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 조선 정부의 허약함으로 말미암아 백성이 겪는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특히 청일전쟁(1894~5년), 러일전쟁(1904~5년) 같은 우리 땅에서 벌어진 주변국들의 전쟁으로 수많은 백성이 살길을 찾아 헤매는 상황임에도 정부가 대책을 내지 못하자, 수많은 사람이 외국선교사들이 있는 교회와 학교로 몰려들었다. 이는 이전까지 서양 선교사와 소수 기독교인들은 배척과 탄압의 대상으로 여기던 가치 판단이 변한 것으로서, 혼란한 시대에 백성을 보호하고 새로운 희망을 제시하는 기독교의 역할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은 사람들이 구원을 소망하고, 복음을 더 잘 받아들이는 계기로 작용하는데, 실제로 1895년 이전까지 기독교인 수는 전부 합쳐도 1000여 명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1906년 통계로는 6만 명 이상이 예수를 영접하고 교회에 출석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복음의 확장성과 교회 성장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교회에 나오는 대상도 천민, 노비, 여자와 아이들만이 아닌, 양반과 지식층의 개종 현상도 두드러진다. 특히 일본의 조선 침략에 반감을 띤 민족주의자들과 독립협회 주축인 서재필, 윤치호, 이승만, 이상재 등이 복음을 듣고 변한 것은 물론이고, 기독교를 우리 민족의 종교로 성장시키고자 하는 열망도 품게 된다.

그리고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한 대부흥운동은 이 땅의 교회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는데, 대표적인 부흥사인 길선주, 블레어(W.N.Blair), 리(G.Lee) 선교사 등이 설교를 통해 교인들 간에 내재한 갈등과 반목 그리고 죄의 문제를 지적하며 회개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자 성령의 압도적인 역사로 기도와 회개 운동이 평양 전역 기독교인들에게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여기에는 길선주 목사를 비롯한 지도자들이 먼저 자신들의 죄를 통회 자복하고, 여러 선교사도 갈등과 미움을 풀고 서로 용서를 구하는 모범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놀라운 성령 강림의 역사는 다시 집단적인 전도운동으로 전개되는데, 평양에 있는 숭실대학을 비롯한 각 기독학교 학생이 수업을 중단하면서까지 사경회와 기도회에 참석하여 은혜 받고, 주일마다 평양 시내와 촌락에 다니며 열정적으로 전도했다. 또 여성들은 ‘특별여자사경회’를 만들어 기도와 전도에 힘쓰고, 각 가정을 복음화 하는 일에 앞장선다.

이처럼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전국적으로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평양에 찾아오고 또 전국 각지에서 ‘성경공부를 중심으로 하는 사경회’가 열려 수많은 사람이 은혜로 변하는 일이 잇따랐다. 이러한 부흥의 기운은 1909~10년 사이에 ‘100만 명 구령운동’과 같은 교파를 초월한 연합 전도 운동으로도 이어진다.

계속적인 선교 확장과 교회 성장은 1912년 이후 각 교단의 조직 확대와 설립으로 이어져 복음이 전래한 지 30년이 되기도 전에 교단별로 총회와 노회를 조선 전역에 세운다.

1905년 이후 일제 침략으로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기독교는 민족 근대화와 독립운동에 많이 관여한다. 당시 지성인들은 주로 기독학교 선교사들의 신교육으로 배출되고, 성경 교육을 받고 성장한 민족지도자들은 주로 학교와 언론기관에서 일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자연스럽게 기독교와 민족운동이 결합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결과로 1909년 무렵에는 전국에 강습소와 야학교를 포함한 사립학교 수가 5000여 개에 달했고, 그중 90% 이상이 기독교계 학교였다.

그러자 일제는 교회와 기독학교에 다양한 방법으로 탄압을 가하고, 서양 선교사들을 회유하는 방법으로 기독교 영향력을 약화하려 한다. 실제로 일부 선교사들이 선교와 조선의 정치 상황을 별개로 취급하여 민족지도자들과 대립하는 예도 발생한다.

그러나 헐버트(H.B. Hulbert) 선교사와 같은 이는 1909년 일제에게 강제 출국 당하기까지 “이 땅의 사람들보다 더 이 나라를 아끼고 사랑한 사람”이라고 불릴 만큼 일제 침략에 저항하였다. 그는 조선 YMCA 초대 회장으로 사회에 기독교 영향력을 키우는 데 힘썼고, 미국에 일본이 저지른 조선 침략의 부당성을 알리는 일과 1907년 ‘헤이그 만국회의’에 이준 열사 등을 파견하는 일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945년에 86세 노구로 해방을 맞은 이 땅을 방문했을 때 “웨스터민스터 사원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고 한 그의 고백에 따라 사후에 양화진에 안장했다.

기독교의 구국 열정과 일제를 향한 투쟁은 1919년 3.1운동으로 거침없이 나타나는데, 기독교 지도자들이 주축이 되어 진행한 이 독립만세운동은 전국에서 일어났고, 이로 말미암아 ‘제암리교회 방화 학살사건’과 같은 일제의 잔악한 핍박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핍박은 ‘신사참배 강요와 거부로 인한 순교’로 이어져,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피흘림의 역사로 계속되었다. 

위 글은 교회신문 <250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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