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성진 목사의 선교史<25>] 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 그리고 권서들의 사역

등록날짜 [ 2011-06-01 12:00:28 ]

기독교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자발적 복음 수용 능력 경이롭고 놀라워

조선 민족을 향한 복음 전파가 세계 선교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성공을 거둔 것은 이 땅 거민들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복음전도 시작부터 잘 알려지지 않은 많은 선교사의 수고가 있었고, 외국 선교사들이 국내로 들어오기 전 만주와 일본에서 복음을 듣고 회심한 선구자들이 한글 성경을 국내로 반입해 많은 사람이 성경을 읽게 했다. 또 서상륜과 백홍준 같은 초기 전도자들이 복음전도를 시작함으로써 이 시기에 조선에 들어온 여러 선교사가 좀 더 쉽게 사역을 진행할 수 있었다.

이는 1885년에 들어온 언더우드 선교사가 “우리는 씨를 뿌려야 할 시기였음에도 동시에 첫 열매들을 거둘 수 있었다”고 한 고백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처럼 조선 선교의 시작은 언더우드 일행이 들어온 것보다 훨씬 이전부터 잘 알려지지 않은 선교사들이 이미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19세기 초부터 중국에 머물던 여러 선교사 중에 귀츨라프, 윌리엄슨, 토마스 등은 조선 선교에 소망을 둔 사람들이었다. 1832년 가장 먼저 조선을 방문해 한자 성경과 전도 문서를 나눠주며 선교 가능성을 본 독일 출신의 귀츨라프 선교사, 토마스와 다우드웨이트를 조선에 보내고 만주 지역에서 로스와 매킨타이어의 사역을 지원한 윌리엄슨 선교사 그리고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조선 선교사(史)에서 첫 순교의 영광을 얻은 토마스(R.J.Thomas) 선교사의 사역은 비록 그 뜻한 바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조선 선교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이들의 소망은 1872년부터 만주 지역 선교를 담당한 스코틀랜드 출신 로스(J.Ross), 매킨타이어(J.Macintyre) 선교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로스는 통상수교거부정책으로 선교 문을 열지 않은 조선을 복음화하려면 성서 번역과 반포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을 예견하고, 1877년부터 만주를 찾은 조선인들을 상대로 10년간 성서 번역에 열정적으로 매진했다. 그들은 무역을 목적으로 만주를 찾은 조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부분적으로 번역한 한글 성경을 주어 다시 조선 땅으로 보냄으로써 권서(각처로 돌아다니면서 전도하고 성경책을 파는 사람) 전도를 시도한다.

조선인으로서 복음 전도를 시작한 것은 의주 출신 상인들인데, 1879년부터 백홍준이 전도하여 의주 지역에 회심자가 생겨나고 성경을 찾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난다. 이 과정에서 백홍준은 3개월간 옥살이했는데, 그는 고초를 받고 모든 재산을 잃었음에도 “나를 위해 돌아가신 주님을 위해 핍박받는 것이 즐겁다”고 고백하는 성숙함을 보였다.

이러한 신앙의 열기는 1881년부터 100여 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매킨타이어를 찾아 번갈아가며 일주일씩 성경공부하는 것으로 발전했고, 1885년 마침내 신자 18명으로 시작한 조선 최초 자생교회인 ‘의주교회’가 탄생하는 감격으로 이어진다.

또 임오군란 등으로 격동하던 조선 정세는 많은 사람을 압록강 너머로 옮겨가 집성촌을 형성하게 하였는데, 로스는 이들을 전도할 목적으로 김청송을 권서로 파송하여 수많은 회심자를 얻는 일에 성공한다. 이에 로스는 웹스터(J.Webster) 선교사와 함께 그곳을 찾아 성경을 가르치고 이후 계속 부흥을 경험한다. 1884년 압록강 연안 조선인 집성촌 28곳에는 최소 신자 600여 명이 거주하였으며, 훗날 이들은 조선 땅으로 돌아가 서양 선교사들이 사역을 시작할 때에 복음으로 연합하는 놀라운 힘을 더했다.

이 시기 번역 성경을 가지고 전도하는 권서를 많이 파송하면서 복음서를 평양에서도 반포하였는데 1883년 누가-요한복음 약 1000권이 사람들에게 전해져 훗날 평양교회 토대가 되었다.

또 같은 시기 서상륜은 한양에서 약 6개월 동안 복음서 400권을 반포하여 회심자를 여러 명 얻었다. 그의 동생 서경조는 형에게 받은 신약전서를 가지고 황해도 소래로 돌아와 성경을 수차례 읽은 후 예수를 영접하고, 1885년 초까지 20여 명을 전도한다. 이후 서상륜과 함께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처소를 마련,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주체적이고 자립적인 조선 교회 모델로 알려진 ‘소래교회’다.

중국과 만주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작은 규모로 선교를 시작하였는데, 일본을 통한 선교 접촉은 주로 개화파 지식인들이 주동하였다. 특히 성서 번역과 도쿄 한인교회 설립 그리고 미국 교회에 조선 선교사 파송을 강력히 요청한 이수정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이수정의 선교 요청은 미국 선교회의 선교사 파송과 선교 전략에 크게 영향을 끼쳐, 미국 교회는 조선의 외세 배격과 서양 종교에 대한 배타성을 간파하고 복음 전파에 앞서 의료와 교육 중심의 선교사를 파송하는데, 이 전략은 조선인들의 편견을 극복하고 의료와 교육 사업을 통한 복음 선교의 기반을 마련하게 했다.

한국 기독교 역사 중 대체로 1876~1884년을 조선 개신교 수용 선행시기로 보는데, 이 시기는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자발적인 복음 수용력이 있었다. 또 전도를 통한 성경 중심의 확장이라는 한국 초대교회 특징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시기이기도 했다.

위 글은 교회신문 <24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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