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0-07-27 07:47:32 ]
<글 싣는 순서>
6. 로마 가톨릭의 초기 선교와 수도원 운동
7. 로마 가톨릭의 후기 선교와 수도원 운동
8. 모라비안 선교와 진젠도르프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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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 시대로 불리는 AD 500~1000년은 로마 제국 변방에 있던 ‘야만인들(로마의 입장에서)’에 대한 복음화가 이루어진 시기다. 유럽 전역으로 복음이 확산된 이 시기 복음화의 가장 큰 특징은 국가 단위 개종, 즉 왕이 기독교를 선택하면 국민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개인 신앙적 차원보다는 정치적 차원에 의한 집단 개종이 많았고, 샤를마뉴 대제의 색슨족 정복 때와 같이 무력에 의한 개종도 일부 있었다.
이러한 초기 선교 방식은 사실상 선교 계획이 로마 가톨릭 수장인 교황과 왕들에 의해서 수립되었고, 이를 감당할 파송 선교사들은 주로 수도사들이었다. 또 각 지역으로 파송된 수도사들은 선교지에 복음 전파와 교육, 영성 훈련을 추구할 목적으로 수도원들을 세움으로써, 수도원이 지역 선교 본부 역할을 했다.
이러한 로마 가톨릭의 초기 선교 방식을 가장 잘 수행한 인물이 8세기 게르만족 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한 보니파키우스(680~754년)다. 영국 출신의 보니파키우스는 40세 이전까지는 평범한 수도사에 불과했으며, 초기에 참여한 선교사역에서는 실패를 맛보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722년 교구가 없던 독일 변방 선교사로 임명되면서 사역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보니파키우스는 실패의 경험을 토대로 자신에게 맡겨진 지역에서 선교 사역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조직 구성과 로마 교구 지원, 왕권 협력’이 필수적임을 인식하고, 지역의 우상 숭배와 난폭한 부족들 개종, 수도원을 세우는 일 등에서 이러한 힘들을 최대한 활용한다.
특히 헤세(Hesse)의 가이스마르(Geismar)에 있던 ‘영험한 상수리나무 사건’은 지역 우상숭배를 무너뜨리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보니파키우스는 북방 민족의 전통 신앙을 근거로 사람들이 가장 신성시하고 일부 기독교인들도 두려워하던 이 토르(Thor)신의 상수리나무를 수천 명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도끼를 들어 찍어버린다. 그는 이 상황을 갈멜산의 여호와와 바알의 전쟁으로 보고,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야 할 시기임을 확신한 것이었다. 이 거대한 나무가 땅 위에 쓰러지고, 저주로 즉사할 것이라던 보니파키우스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이교도들은 그가 전한 하나님이 확실히 그들 조상들의 신보다 강력하다고 인정하고 복음을 수용하게 된 것이다. 보니파키우스는 쓰러진 이 나무를 써서 교회를 건축하였다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복음 전파는 급물살을 타게 되고, 헤세와 튀링겐, 바바리아 지역에 이르기까지 전도 영역이 확산된다. 탁월한 학자요, 뛰어난 조직가며, 열렬한 전도자인 보니파키우스는 왕족들의 토지를 얻어서 라이크나우, 풀다, 로스크 등 각 지역마다 큰 수도원들을 세웠고, 이 교육기관들을 통하여 독일 전역을 담당할 성직자들이 성장할 수 있었다.
그의 선교 전략은 우선 집단 개종 시 가장 빠른 시간에 침례(당시 세례)를 주고, 이 명목상 교인들을 실천적인 신자들로 교화하는 일에 주력했다. 이를 위해 참회 규칙들과 관습을 만들어 지키게 한 점들이다. 이러한 사역은 주로 수도원을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수도원에서는 모든 사람이 기도와 찬양을 수행함과 함께 농지 경작에 참여하고, 미신적 신앙을 바로잡는 신앙 훈련을 철저히 지키게 하였다. 이러한 수도원 훈련이 좋은 평가를 받아 여자들을 위한 수도원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수도원 훈련과 프랑크 교회들의 개혁에 힘쓰던 보니파키우스는 연로함을 이유로 753년에 교회 감독 일에서 물러나, 다시 선교의 정신으로 독일을 떠나 프리시아족들이 사는 네덜란드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한다.
그의 능력 있는 설교는 많은 회심자를 얻었지만, 이교도들의 반발과 폭력도 계속해서 뒤따랐다. 그러다가 755년, 독컴(Dokkum)지역에서 전도한 새신자들을 기다리고 있을 때에 갑자기 공격한 이교도들에 의해 이 70대 노인과 동료 50명이 모두 순교하게 된다.
그의 삶은 여기서 그쳤지만 그가 보여준 선교 전략과 수도원을 통한 훈련, 그리고 선교 방식 등은 이후에도 유럽 전역에 걸쳐 큰 영향력을 끼쳤다.
위 글은 교회신문 <20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