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성진 목사의 선교史<7>] 로마 가톨릭 선교의 부흥과 한계

등록날짜 [ 2010-08-25 07:29:26 ]

 <글 싣는 순서>
7. 로마 가톨릭의 후기 선교와 예수회   
8. 모라비안 선교와 진젠도르프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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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한 집단 개종 방식 등으로 반발 거세

로마 가톨릭 시대 초기(AD 500~1000년) 선교는 유럽을 향한 복음의 확산 과정에서 그것이 집단 개종이든, 무력에 의한 것이든, 또 선교사와 수도원 운동을 통한 것이든 기독교의 입지를 세울 어느 정도의 성공을 이루었다. 이를 바탕으로 기독교 세력은 이후 500년간 유럽 각 지역을 향한 정복과 동맹, 그로 말미암은 집단 개종 방식으로 로마 가톨릭 중심의 기독교적 색채를 유럽 전역에 퍼지게 한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동서 교회의 분리(1054년) 문제, 외부적으로는 이슬람 세력의 거센 도전에 직면하면서 로마 가톨릭이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 분기점이 된 사건이 바로 십자군 전쟁(1099~1291년)이다.

이슬람 세력에게 빼앗긴 팔레스타인 성지 회복을 호소하면서 벌인 이 십자군 전쟁은 시간을 더할수록 초기에 가진 신앙적 명분은 희미해지고, 오직 정복과 살육을 위한 악행으로 점철했다.

결과적으로 200년에 걸친 이슬람권과의 전쟁에서 서로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채 끝났으며, 당시 십자군의 악행은 군대가 아닌 모슬렘 양민 수만 명을 학살한 것, 유대인들을 화형에 처한 일, 또 도움을 요청한 동방 교회와 제국을 오히려 침탈하는 등 추악함을 드러냈다. 그때부터 900년이 지난 지금도 과거 십자군의 잔악한 행위는 중동지역 사람들에게 원한으로 남아, 그들이 기독교 선교사들을 향한 잔인한 보복과 살인의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도 로마 교황청의 여러 정치적 패착과 성직자들의 타락에도 각 지역에 더 많은 수도원과 기독교 대학이 생겨남으로써 이들을 통한 신앙적 깊이와 영성은 계속 발전한다.

또 수도원에서 훈련받은 순종과 금욕생활을 근거로 선교에 참여하고자 하는 일꾼들로 말미암아 수도원 중심의 선교도 더욱 활기를 갖는데, 그중 대표적인 4개 수도원 선교단체는 아시시(Assisi)의 성자 프란시스코가 설립한 ‘프란시스코 수도회’, 스페인 출신 도미니크가 세운 ‘도미니칸 수도회’, 교황 알렉산더 4세가 세운 ‘오거스틴 수도회’,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세운 ‘예수회(Jesuit Order)’다.

그 중 ‘예수회’가 활동한 16~18세기를 가톨릭 선교 황금기라고 부르는데, 이는 스페인, 포르투갈 등에 의한 신대륙 발견과 함께 예수회 출신 선교사들이 각 지역 선교활동에서 가장 적극적이고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스페인 군인 출신으로 알려진 로욜라는 1534년 파리에서 친구 6명과 ‘예수회’라는 그리스도의 군사조직을 갖추고 이교도들을 회심시키는 일에만 헌신할 사람들을 모집하였는데, 이 예수회는 군대와 같은 엄격한 위계질서와 과감한 선교 정신으로 무장한 단체였다.

1540년 교황에게 인정을 받기 시작한 예수회는 인도, 중국, 일본, 필리핀 등 아시아와 브라질, 페루, 멕시코, 캐나다 등 아메리카 지역으로 선교사들을 파송한다.

예수회 출신의 대표적 선교사로는 인도와 일본에서 사역하면서 선교에 대한 열정은 물론 그 전달 방법에 매우 탁월한 ‘프란시스 자비에르’, 중국 문화를 수용하여 선교에 활용하고 ‘천주’개념을 일깨웠으며 ‘천주실의’를 저술한 ‘마테오 리치’, 인도에서 승려가 존경받는 것을 보고 그들처럼 고행과 수행을 통한 전도방식으로 브라만 계급에까지 전도한 ‘로베르토 데 노빌리’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예수회 출신 선교사들의 가장 큰 특징은 이전 선교사들보다 선교 현지 문화를 존중하여, 현지 토착 언어를 배우고, 현지 정치적 상황을 존중하며, 현지인들의 재능을 활용한다는 것이다. 또한 현지 문화를 복음 전도 상황에 최대한 활용하는 것과 현지인들의 영적인 필요뿐 아니라 경제, 문화, 교육 등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끼치는 총체적 선교를 진행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지 문화를 존중하고 활용하는 데 따른 결정적인 실수도 발생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마테오 리치가 중국 문화 수용 과정에서 발생시킨 ‘조상 제사’의 수용에 관한 문제로 가톨릭 선교사들 내부에서도 찬성할 수 없는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최종적으로 예수회 선교활동은 1773년 교황청의 현지 문화 말살 정책과 다른 수도회들과의 정치적 싸움으로 선교 중단 명령을 받게 되고, 이로써 왕성했던 가톨릭 선교도 막을 내리게 된다.

 

위 글은 교회신문 <205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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