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성진 목사의 선교史<8>] 18세기 선교 운동 이끈 ‘모라비안 선교회’

등록날짜 [ 2010-09-07 21:18:53 ]

<글 싣는 순서>

8. 모라비안 선교와 진젠도르프 백작
9. 인디언 선교 데이빗 브레이너        
        .
        .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 선교가 강력한 수도원 규율로 훈련된 선교사들을 각 식민지에 파송함으로써 이방인들을 향한 선교에 크게 힘썼던 것에 비해 이 시기 개신교는 지도자들의 선교 신학 부족(그들은 예수님의 지상명령이 사도 시대로 마쳤다고 여김)과 교파 간의 싸움(주로 루터파와 칼빈파), 유럽 내 지역적인 고립 등의 이유로 선교에 대한 필요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수많은 개신교도가 복음이 없는 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 그들의 중대한 사명임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은 18세기 독일에서 일어난 ‘경건주의 운동’ 때문이었다. 필립 스페너와 프랑케 등 경건주의 지도자들은 종교전쟁으로 신앙적 회의와 무신론, 신비주의, 형식주의에 빠져가던 사회 속에서 교회의 영적 부흥 운동을 주도하며, 신앙생활에 있어 개인의 회심, 성경 연구, 기도, 선교 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건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경건주의 운동이 신자들에게 큰 지지를 얻자 정부와 기성교회 핍박이 시작되었고, 지도자들은 각 대학에서 쫓겨났다. 결국 스페너는 10년간 ‘할레’지역에 대학을 개설하고, 이 학교를 유럽 경건주의 복음운동과 18세기 선교운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또 이 학교를 통하여 최초 개신교 선교단체인 ‘덴마크-할레 선교회’가 시작된다. 이 선교회는 할레 대학 출신의 많은 선교사를 배출하며 큰 성장을 이룩하지만, 점차적으로 초기 선교 열정이 퇴색하면서 그 기능을 상실한다.

진젠도르프 백작의 회심
이러한 시기에 할레 대학 경건주의에 영향을 받은 또 다른 선교 공동체가 서서히 나타나는데, 오랜 시간 가톨릭 박해를 피해 떠돌다가 ‘헤른후트’지역에 정착한 체험적 신앙공동체인 ‘모라비안 형제회’였다. 그리고 이 공동체의 리더가 되어, 18세기 세계 선교에 큰 역할을 해낸 사람이 바로 그 지역 영주였던 ‘니콜라스 진젠도르프 백작’이다.

1700년, 독일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진젠도르프는 10세부터 할레 지역에서 교육을 받으며 경건주의자인 스페너와 프랑케 등에게 영향을 받아 경건주의 신앙의 토대를 쌓았다. 그는 성장기 동안 귀족으로서 출세와 장래가 보장된 일들에 관하여는 아무런 만족과 기쁨을 찾지 못하다가, 자신의 영지로 피난 온 모라비안 교도들을 만나면서 비로소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기로 결단한다.

1727년, 진젠도르프 백작과 이 모라비안 공동체에 성령께서 강하게 임하여, 그들 안에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강한 공동체 의식이 고조되면서 놀라운 영적 부흥이 일어난다. 또 하루, 일주일, 일 년을 향한 지속적인 기도 운동과 함께 세상 모든 사람들에 대한 선교와 헌신의 마음이 커지면서 그것이 곧 ‘모라비안 선교운동’으로 발전한다.

자급자족의 평신도 선교
모라비안 선교회는 1732년, 서인도제도 ‘성 도마(St. Thomas)’ 섬에 사는 흑인 노예들을 위한 선교사들을 처음 파송한 이래로 그린랜드, 북아메리카, 라플랜드, 남아메리카, 남아프리카, 라브라도 등 지역에 지속적으로 선교사들을 파송하는데, 첫 파송부터 1760년까지 30년 사이에 선교사 226명이 10개 국가에 입국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고 그 땅에서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처럼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인 모라비안 선교 특징은 그 공동체 안에서 선교사를 세워 파송하는 비율이 매우 높았다. 1930년 통계에 따르면 200년간 거의 선교사 3000명을 파송하였으며, 이는 그들 전체 교인수의 1/12 비율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또 그들 대다수가 정규 신학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평신도 사역자로, 각 가정이 여러 선교지로 이주하여서 일정한 직업을 통하여 ‘자급자족’ 하는 형태로 선교 사역을 담당하였다. 즉 자신의 직업인 기술공, 교사, 의사, 상인 등 삶의 방식을 통해 복음 전도자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들은 비록 자신의 직업이 선교지에서 낮은 신분에 처하였을지라도 철저한 현지 적응 훈련에 힘쓰며, 토착민들을 이해하고 상대방을 향한 겸손과 근면함, 인내의 힘으로 선교지의 편견들을 극복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살고자 하였다. 그리고 100년간이나 지속되었던 모라비안 교인들의 24시간 중보기도는 각 선교지 사역의 근원적 힘이 되어 여러 선교사들을 영적으로 지원하는 통로가 되었다.

이러한 것들이 바탕이 되었기에 18세기 선교는 모라비안 선교회에 의해서 주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207호> 기사입니다.

    아이디 로그인

    아이디 회원가입을 하시겠습니까?
    회원가입 바로가기

    아이디/비번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