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0-10-04 23:13:37 ]
갖은 핍박에도 인도에 복음 전하며 악습 폐지에 앞장
선교 정신과 방법론에서 많은 선교기관에 영향 끼쳐
종교 개혁에 있어 마르틴 루터의 수고를 높이 평가하는 것과 같이, 개신교 선교에 있어 윌리엄 캐리의 사역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물론 윌리엄 캐리 이전에도 여러 선교사가 있었고 그가 선교를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개신교 선교의 여명이 밝아오던 그 시대에 교회 사명이 선교임을 일깨우는 일에 하나님은 캐리를 사용하셨다. 오늘날도 1793년 인도로 떠난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1761~1834)의 인도선교를 교회사 100대 사건에 기록할 만큼 당시 상황은 매우 시의적절했다.
가난한 마을 학교 교사 아들로 태어나 14세부터 구두수선을 배운 캐리는 18세에 거듭난 회심을 경험하고, 영국 국교회를 떠나 침례교인이 된다. 20세에 5세 연상인 도로시와 결혼하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일과 함께 성경 공부, 다양한 책을 보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인다. 배움에 대한 그의 열정은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등을 독학으로 마칠 만큼 매우 강렬했다. 시골 마을에서 구두 수선과 평신도 목회 일을 담당하던 캐리는 26세에 목사 안수를 받는다.
신기하게도 캐리가 품은 선교에 대한 관심은 『제임스 쿡 선장의 항해기』라는 책을 통해서 비롯했고, 『구스리의 지리입문』,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 등 세계 지리와 선교에 관한 책들을 통해서 더욱 많은 영향을 받는다. 이후 캐리는 선교라는 시각으로 성경을 보면서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가 선교라는 사실을 확신한다. 그러나 당시 목회자 대부분이 선교의 지상명령은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것으로 여기고 도리어 캐리를 비웃으며 만류한다. 하지만 캐리는 1792년 봄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기독교인들이 강구해야 할 수단들을 찾아봄』이라는 제목으로 87페이지 분량 책을 발간해 선교에 대한 자신의 강한 의지를 전달한다.
이 책은 해외 선교 필요성을 아주 설득력 있게 말하고, 선교사를 보낼 이유가 없다는 주장을 매우 논리적으로 반박한다. 그리고 그는 침례교연합회 소속 많은 목회자 앞에서 이사야 54장 2~3절을 본문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위대한 결과를 기대하라”는 말씀을 선포한다.
그의 설교에 감동받은 소수 목회자가 새로운 선교회를 조직하는데 이것이 바로 영국 침례교 선교회다. 이러한 배경 가운데 1793년 교회 파송을 받고 가족과 함께 인도에 도착한 그는 동인도회사가 선교를 반대하며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가운데 사역을 시작한다. 이후에도 계속된 동인도회사의 방해, 말라리아, 다섯 살짜리 아들의 죽음, 아내 도로시의 정신병, 인도인 개종자가 없는 사역 등으로 캐리의 선교사역은 난항을 거듭한다. 결국 동인도회사와 마찰을 피하려고 후속 선교사들과 함께 덴마크령 세람포(Serampore)로 옮긴 캐리는 그곳에서 34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면서 세람포를 인도 침례교 선교 중심지로 세운다.
윌리엄 캐리가 선교 사역에 성공한 것은 먼저 그의 바른 인격과 태도에 기인한다. 선교 사역을 위해 가족과 물질 등 자신의 많은 것을 희생하고 인내하는 모습, 함께 팀을 이룬 상대방의 결함을 감싸주고 포용하는 모습 등이 많은 이의 모범이 되었다.
또 그는 선교에 대한 남다른 관점과 적용의 탁월성이 있었다. 그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복음을 전하고, 선교지 국가 언어로 기록한 성경을 보급하고, 가급적 빠른 시간에 교회를 세우고, 비기독교인의 문화 배경과 사상을 연구하며, 지속적으로 토착인 교역자를 양성하는 일 등을 전략적으로 실행하였다. 이러한 차원에서 동양 주요 언어로 성서를 번역하고자 인쇄시설 설립 및 번역 작업을 통해 6개 언어로 성서를 번역하는 거대한 사업을 진행하였는데 그 중 캐리는 벵골어, 산스크리트어, 마라티어 번역을 담당했다. 그리고 이 자료들을 가지고 갠지스, 오릿사, 미얀마 지역까지 선교사를 보내 선교를 확장했다.
캐리는 교회 지도자와 복음 전파자를 양성하기 위해 세람포 대학을 세웠다. 거대한 대륙 전 영역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현지인 사역자들의 능력을 키우는 것이 최상의 방안이라는 판단과,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가 인도인을 서구 선교사와 동등한 자격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또 그는 대부분 선교사처럼 서구 문화를 현지 문화에 이식하려는 오류를 범하지 않고 인도 사람과 인도 문화를 존중하는 한편, 목숨을 빼앗는 인도의 악습들과 싸워 과부 화형, 유아 살해 등을 폐지하는 데 앞장섰다.
이처럼 윌리엄 캐리는 선교 정신과 방법론에서 시대를 앞선 사람이었고, 그의 장기간 사역과 선교 편지들에 감동받아 유럽과 미국 내에서 많은 선교기관이 결성되어 19세기 선교가 찬란히 꽃피는 기초를 세웠다.
위 글은 교회신문 <211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