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성진 목사의 선교史<12>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 부부

등록날짜 [ 2010-11-02 08:23:04 ]

미얀마 어 성경 번역과 영어사전 편찬에도 헌신
가족 모두 현지에서 순교… 끝까지 선교지 지켜

아도니람은 1788년 메사추세츠 주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6세에 브라운 대학교에 입학, 4년 과정을 3년 만에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다. 대학 시절 잠시 신학적 혼란을 경험한 아도니람은 1808년 정통신학을 고수하는 앤도버 신학교에 입학하여 복음의 진리를 발견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기로 한다. 이 학교에는 사무엘 밀즈가 다니고 있었는데 밀즈는 아도니람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어주었고 아도니람은 선교의 열정을 불태우게 된다.

아도니람과 소수 학생이 가진 선교에 대한 높은 열정은 마침내 ‘미국 선교사 파송 위원회’를 결성하기에 이르고, 선교 파송을 준비하던 아도니람은 자신처럼 이방인 선교에 헌신을 결심한 낸시를 만나 1812년 2월에 결혼, 2주 후에 인도를 향해 떠나서 6월 중순 콜카타에 도착한다. 마침내 미국이 최초로 파송한 선교사 아도니람 저드슨 가정이 선교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이동하는 4개월 동안 아내와 함께 성경공부를 하던 아도니람은 세례에 관한 오랜 그의 견해를 바꾸어, 더욱 성경적인 침례 교인으로 살아갈 것을 결심하고, 미국 침례교회 선교사로 사역할 것을 선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1814년 5월 ‘미국 침례교 해외선교부’를 발족하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고, 현재는 가장 많은 선교를 담당하는 선교단체로 성장하였다.

인도에 도착한 저드슨 부부는 선교를 방해하는 동인도회사의 추방 명령으로 결국 미얀마로 가게 된다. 미얀마는 우상을 섬기는 불교국가로 선교사 박해에 악명이 높은 지역인데, 미국을 떠나온 지 2년 만에야 미얀마 양곤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저드슨 부부는 양곤에 집을 장만하고 매일 12시간씩 미얀마 말을 배웠다. 아내 낸시는 동네 여인들과 만나며 조금씩 구어를 익혔으나, 아도니람은 단어와 문장과 절 사이에 아무런 구별도 없고 마침표도 없는 너무나 생소한 미얀마 문자만을 대하면서 힘겨운 공부를 계속해야만 했다. 아도니람은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현지인들과 만나고 대화하기 위해 미얀마 현지 문화인 자야트를 세운다. 자야트는 사방이 트인 정자 같은 곳으로 누구든지 와서 쉬며 토론하고, 가끔 쉬어가는 승려들에게 설법도 듣는 장소다. 저드슨 부부는 선교기지 인근에 자야트를 세워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친화하는 일에 성공한다. 그리고 마침내 선교사역 5년 만에야 이곳에서 만난 사람 중 예수를 구주로 신앙 고백하는 개종자들이 생겨났다. 그는 당시 그 지역에서 회심자 한 사람을 얻는 일을 “호랑이 송곳니를 빼는 것처럼 힘겨웠다”고 회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의 성과들이 나타나자 곧 미얀마 정부의 박해가 이어졌고, 또 현지의 열대성 열병도 큰 장애가 되었다. 저드슨 부부는 이 병에 걸려서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으나, 안타깝게도 그들이 양곤에 도착한 해에 태어난 아들 로저는 이 열병으로 6개월 만에 숨을 거두었다.

저드슨 부부의 선교에 가장 어려웠던 상황은 영국과 미얀마 전쟁으로 아도니람이 여러 선교사와 함께 간첩으로 오인당하여 1년 6개월을 감옥에 갇힌 사건이다. 낸시는 남편 옥바라지를 하는 한편, 자신들은 미국인이며 영국군과 관계없음을 호소하면서 어린 딸 마리아를 돌보는 힘겨운 상황을 감당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1825년 아내 낸시와 어린 딸 마리아가 순교를 맞게 되고, 그로 말미암은 충격으로 아도니람은 무거운 죄책감과 슬픔으로 모든 관계를 끊고 정글에서 혼자 머물기까지 한다. 그런 모든 시련의 시간에도 여러 동료 선교사와 많은 현지 개종자의 기도가 이어졌고, 하나님은 사랑의 손길로 아도니람을 치유하셨다.

다시 선교를 위해 일어선 아도니람은 미얀마 여러 지방을 순회하며 후배 선교사들을 돕는 일과 자신을 통한 미얀마 어 성경 번역에 대한 큰 사명을 확인하고, 죽을 때까지 이 일에 전념한다.

1850년 마침내 그가 질병으로 지친 육신을 누이며 선교 사역을 마쳤을 때, 37년을 사역한 그와 그 가족의 희생적 선교를 통해 미얀마교회에는 약 7000여 교인이 세워졌고, 그는 말년까지 후배 선교사 163명을 감독하였다. 또 그토록 갈망한 미얀마 성경 번역 출판은 물론 미얀마 영어사전을 완성함으로써 다음 세대 선교사들에게 더욱 쉽게 선교지 언어를 익히게 하는 유산까지 남겨주었다.

다음은 <로버트와 메리 모팻 부부의 아프리카 선교> 입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215호> 기사입니다.

    아이디 로그인

    아이디 회원가입을 하시겠습니까?
    회원가입 바로가기

    아이디/비번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