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0-12-01 10:31:46 ]
후원 모금 없이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선교 방식 채택
CIM 창설… 현재 OMF로 명칭 변경 후 왕성한 활동 계속
허드슨 테일러는 1832년 영국 요크셔(Yorkshire)에서 태어났다. 약사며 평신도 설교자인 부친은 테일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자신의 아들이 중국 선교 일꾼이 되기를 소망했다. 이러한 믿음의 가정에서 자랐지만, 테일러는 17세가 돼서야 비로소 회심의 고백과 함께 중국 선교사로 나아갈 것을 결심한다.
그는 일생을 선교사로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는 방법의 하나로 의사가 되고자 하여, 로버트 하디 박사의 조수로 시작하여 런던 병원 수련의로 공부를 한다. 또 테일러는 선교사역을 담당하기 위해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살기 위한 신앙 훈련에 힘쓴다.
이러한 시기에 중국에서 갑자기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자 자유롭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다고 판단한 ‘중국복음전도협회(CES)’는 자신들이 후원하는 테일러에게 중국 선교사로 가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테일러는 1853년 9월 의학 공부를 중단하고 21세에 중국을 향해 떠난다.
1854년 봄, 상해에 도착한 테일러는 현지인에게 더 다가서기 위해 중국 옷을 입고, 중국식대로 살면서, 자신을 파송한 ‘CES선교회’ 통제에 따르기보다는 다른 선교회 선교사들과 협력하여 전도 여행을 하곤 했다. 선교 본부는 이 점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결국 1857년 테일러는 ‘CES선교회’를 탈퇴한다.
1854~60년까지 6년간 테일러는 상해와 항주와 닝보에서 지냈으며, 1858년 1월 선교현장에서 만난 런던 선교회-사무엘 다이어 경의 딸 마리아와 결혼한다. 그리고 테일러가 닝보에서 병원 사역을 맡아야 했기에 그들은 3년간 닝보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 병원의 많은 업무는 테일러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결국 그는 의학 공부를 더 해야 함을 깨닫는다. 또 환자를 치료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아편중독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던 중 자신이 결핵에 걸려 1860년 치료를 받으려고 영국으로 귀국한다.
고국에 돌아온 그는 5년간 런던 병원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응용화학 과정과 산부인과 과정을 마치고 왕립 외과대학 회원 자격을 획득한다. 또 중국인 조수와 다른 선교사에게 도움을 받아 신약성서 중국 닝보 개역판을 번역하였다.
이 시기에 테일러는 「중국의 영적 필요와 요구들」이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이것이 중국 선교를 위한 많은 지원자를 모으게 했고, 마침내 1865년 ‘중국 내지 선교회(China Inland Mission, CIM)’가 탄생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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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내지 선교회’는 테일러의 선교 경험과 성격을 반영하여 어떤 교파에도 속하지 않고 정규 신학 과정과 관계없이 노동자 중에서 지원자들을 많이 모집하고 훈련했으며, 선교 본부도 중국에 두기로 하였다. 그리고 모든 선교사에게 정규 봉급 형식이 아닌, 필요에 따른 후원금 분배만을 약속한 채 모금활동을 일절 중지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만 의지하도록 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방법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면 필요한 모든 것이 준비된 것”이라는 신앙 선교(Faith Mission)에 근거한 것이다.
1866년 5월, 그는 아내와 자녀 그리고 선교일행 16명과 더불어 다시 중국행 배에 올랐다. 테일러와 내지 선교회는 초창기부터 순회 전도를 원칙으로 했다. 그가 다른 선교사들처럼 문서 사업을 중요시하지 않은 이유는 선교 대상에 문맹자가 많다는 이유다.
처음에는 상해와 주요 해변도시들로 시작하여 내지 지방들로 이어졌고 광대하게 흩어져 있는 중국 소수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선교를 위한 선교사 가정들의 희생은 테일러에게도 예외일 수 없어, 1870년 7월 그의 아내인 마리아는 결핵성 장염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내지 선교회 활동이 더욱 왕성해지면서 테일러의 사역은 중국 전역을 돌며 여러 선교사들을 감독하는 것에 맞춰졌다. 1882년까지 내지 선교회는 중국 모든 성에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선교회를 설립한 지 30년이 지난 1895년에는 640명이 넘는 선교사가 중국을 위해 자신의 삶을 드렸다. 오늘날 중국 지하교회들도 그 영향을 계속해서 받고 있다.
테일러는 오직 중국 복음화를 앞당기기 위한 노력으로 총 11차례나 배로 영국을 왕래하였고, 중국 선교를 위한 북아메리카와 호주 선교 본부, 유럽 연합 선교회 등 창설에도 협력한다. 1905년 초, 테일러는 극히 쇠약해진 상태에도 전 생애를 바친 중국을 그리워하며 다시 중국을 찾았고, 한 달 후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의 유골은 그의 아내와 자녀가 묻힌 중국 땅에 함께 장사되었다.
* 참고; 1911년 1월까지 중국 내지 선교회와 관련한 선교사는 968명에 이르고, 개인적인 모금 없이 오직 기도에 의지하여 후원금 147만 파운드가 들어왔다. 그래서 1914년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선교회가 되었고 최대 전성기인 1934년에는 선교사 1368명이 활동하였다. 1950년 공산당이 중국을 장악하자 내지 선교회는 다른 선교단체와 함께 중국에서 추방되었고, 1964년 내지 선교회는 그 명칭을(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 OMF)로 바꾸었다.
위 글은 교회신문 <219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