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성진 목사의 선교史<16>] 중국 선교지로 떠나는 영국 젊은이들

등록날짜 [ 2010-12-29 15:06:48 ]

허드슨 테일러와 함께하며 선교 열정 불태워

이번 호에도 ‘케임브리지 7인’이라 불리는 학생 선교에 대해 알아본다. 지난주 스탠리 스미스(Stanley P. Smith), 찰스 스터드(Charles T. Studd)에 이어 이번 호부터는 몽테규 보삼프(Montagu. H. P. Beauchamp), 윌리엄 카셀(William W. Cassels), 세실과 아더 폴힐 터너(Cecil and Arther polhill Turner)형제, 딕슨 호스트(Dixon E. Hoste)에 대해 알아본다.
<편집자>

몽테규 보삼프(Montagu. H. P. Beauchamp)는 무디의 전도 집회를 통해 영적 각성을 경험하였고,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하면 영국 국교회 목사로 살아갈 것을 계획했다. 그러나 1884년 여름부터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일반 목회자로 부르신 것인지 아니면 척박한 해외 선교지로 가기를 원하시는지를 기도하고 고민하였다. 그러던 중 동료인 스탠린 스미스와 찰스 스터드와 교제하면서 중국 선교지로 나가는 것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명임을 받아들인다.

가장 연장자인 윌리엄 카셀(William W. Cassels)은 1859년에 포르투갈 오포토에서 존 카슬(John Cassels)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카셀도 케임브리지에서 열린 무디의 전도 집회에서 은혜를 받았다. 졸업 후에는 영국 국교회 목사로 살아갈 것을 계획했기에 1882년부터 1884년까지 사우스 람베스(South Lambeth) 교회 부목사로 사역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보삼프와 마찬가지로 그도 자신의 삶을 중국 선교 현장에서 불사르기로 한다.

세실과 아더 폴힐 터너(Cecil and Arther polhill Turner)는 베드퍼드(Bedford) 지역에 사는 영향력 있는 장교 출신 정치가인 프레더릭(Frederick C. Turner)의 아들들이다. 프레더릭은 자신의 세 아들 중 첫째는 정치가로, 둘째는 군인으로, 셋째는 성직자로 키울 것을 희망하였다. 부친의 기대대로 둘째 세실은 케임브리지 대학을 마친 후 기병대 장교로 임관하였다. 셋째 아더는 학업보다는 연극과 운동을 즐기며 조금은 자유분방하게 학창시절을 보내던 중 무디의 전도 집회에 참석한다.

처음에 아더는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한 무디가 영향력 있는 전도 집회를 한다는 것에 대해 편견을 가졌지만, 집회를 통하여 임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고 내면의 영적인 변화와 하나님의 인도를 따른다. 또 그의 형인 세실을 무디의 전도 집회에 초청하여 같이 참석한다.

세실은 군인 신분으로 아더를 따라 집회에 참석하여 뜨거운 은혜를 경험하지만, 새 진로를 결정하는 일에는 주저한다. 자신이 소속한 군대가 신앙적으로 무관심한 특성이 있는 데다, 이미 선택한 군인으로서 성공하는 길을 갈 것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새로운 지역에 선교사로 나갈 것인지에 대한 선택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실은 기도 가운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중국 선교의 길을 가기로 한다.

딕슨 호스트(Dixon E. Hoste)는 왕립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포병 장교로 케임브리지 출신은 아니지만, 육군 소장이던 그의 부친이 케임브리지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군인 교회에서 정해진 예배를 드리는 것이 신앙생활 전부였던 호스트는 무디의 전도 집회에 참석한 그의 형 윌리엄의 기도와 권면을 통해 집회에 참석하여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다. 무디의 십자가 구속에 관한 설교를 들은 딕슨은 “바로 지금이 내가 그리스도를 영접할 시간이다. 이제 나는 믿음으로 온전히 구원받았다”는 확신으로 신앙을 고백하기 위해 회중들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이후 그는 세상에서 성공이 보장된 자신의 진로를 바꾸어 하나님의 선교 현장에 내어 놓는다.

이렇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가운데 영적 각성을 경험하고 자신들의 삶을 하나님께 내어놓은 케임브리지 7인은 모두 ‘중국 내지 선교회(CIM)’에 지원하고, 영국과 스코틀랜드 전역을 돌며 다른 학생들에게 자신들이 받은 은혜를 간증하고 함께 선교에 나갈 것을 설득한다.

1885년 2월 2일, 이들은 케임브리지대학 길드 홀(Guild hall)에서 중국 선교지로 나갈 것을 선포한다. 그리고 사흘 후 빅토리아역에서 출발, 도버와 칼레, 브린디시, 수에즈, 콜롬보를 거쳐 3월 18일 중국 상해에 도착한다.

‘중국 내지 선교회(CIM)’ 대표인 허드슨 테일러는 이들을 맞아 중국어 공부와 중국 문화 적응.훈련을 마치면 내륙에 들어가 선교 활동을 시작하는 것 등 선교 지침을 전달하였고, 비로소 케임브리지 7인의 중국 사역이 시작됐다.

그때부터 파란 눈의 젊은 선교사들은 중국식 복장과 변발을 하고 중국 전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파했다. 매일같이 장거리를 걸어야 했기에 그들의 발은 심한 상처로 가득했다. 그러나 1885년 이 젊은이들의 중국 선교 지원은 이미 영국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그 후 5년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중국 내지 선교회(CIM)’로 지원한 선교사 수는 이전 163명에서 800여 명으로 놀랍게 증가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2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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