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1-01-11 11:35:13 ]
각기 다른 사역으로 중국 선교 현장에서 활약하다
중국 내륙에 있는 각 선교 현장으로 파송되면서 케임브리지 7인의 사역이 갈라졌다.
윌리엄 카셀은 처음에 산시 성에서 일했고, 후에는 중국 서부에서 일했다. 그는 중국 서부 새 교구에서 감독으로 안수받고 1923년에 죽을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고 계속 사역하였다. 그는 7인 중에서 가장 먼저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스탠리 스미스는 중국 북부에서 사역을 시작하였고, 중국어로 유창하게 설교할 능력과 열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불신자들의 최종 운명에 관한 성경 해석 논쟁으로 1902년 CIM을 탈퇴한 후 무소속으로 산시 성 동부에서 사역하였다. 독자적인 사역으로 말미암은 어려움에도 스미스는 끝까지 전도와 양육, 선교 사역을 일기(日記)로 기록하는 일에 힘쓰다 1931년 트세-쵸에서 사역을 마감했다.
찰스 스터드는 파송 때부터 최선으로 사역하다가 1894년에 건강이 악화하여 결국 중국에서 철수하였다. 그리고 인도와 영국과 미국 등에서 선교 동원에 대한 사역을 담당하다가 1910년 새로운 선교 개척을 위해 오랜 지병과 주변 사람의 만류에도 아프리카 중심부로 알프레드 벅스톤(후에 사위가 됨)이라는 조력자와 함께 선교를 출발한다. 스터드는 아프리카의 마음(Heart of Africa Mission)이라는 선교단체를 구성하고,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선교 사역에 쏟아 부었다. 동역자들과 마찰이 있었음에도 아프리카 현지인들과 같은 삶을 추구하며 20년을 사역한 그는 마침내 1931년 콩고 아이밤비에서 잠들었다. 그의 장례식장에는 1000명이 넘는 아프리카인이 추모하였고, 그의 사위인 노먼 그럽이 출간한 선교 여정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또 스터드를 통하여 창설한 HAM은 현재까지도 왕성하게 활동 중인 WEC 선교회로 계속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
폴힐 형제 중 동생인 아더 폴힐은 1888년 중국에서 안수를 받았고, 10년 동안 쓰촨 성 북부 빠조우와 주변 지역에서 사역을 담당하였다. 그는 북청사변과 1911년 혁명 기간 내내 중국에서 사역을 담당하다가 1928년에 66세로 은퇴하여 잉글랜드 남서부의 허퍼드셔에서 살다가 1935년에 소천했다.
아더의 형 세실 폴힐은 티베트와 그 주변 지역에서 사역하면서 많은 티베트 친구를 얻었으나, 1892년에 발생한 폭동으로 말미암아 세실과 그의 아내는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병에 걸렸다. 1900년 북청사변으로 다른 선교사와 해안으로 철수하였을 때, 세실은 병의 악화로 영국으로 송환되었으며, 의사들은 그가 중국에 돌아가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후에도 7인의 선교사들을 순회하며 심방하였고, 그들의 사역을 위해 기도하다가 1938년 80세로 하우베리에서 소천했다.
몽테규 보쌈프는 뛰어난 순회 설교자였다. 그는 전도 여행을 매우 좋아했고, 매일 군중을 향하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쓰인 문구를 붙이고 다녔다. 1900년 북청사변 때, 잠시 철수한 그는 1902년 중국으로 돌아가 계속 순회 설교를 담당했다. 1911년 영국에서 안수를 받은 보쌈프는 1차 세계대전 중에는 이집트와 그리스, 북러시아 등에서 종군 목사로 사역하였고, 1929년 다시 중국에 돌아온 그는 노년에도 강하고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사역하였다. 1939년 그의 나이 79세가 되었을 때, 그는 이미 암으로 고통 중이었으나 후배들과 함께하는 선교 사역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해 10월, CIM 선교사로 사역 중인 그 아들의 선교기지인 파오닝(Paoning)에서 비로소 긴 선교 여행을 멈추었다.
딕슨 호스트는 산시 성으로 파송되어 그곳에서 1896년까지 일했다. 그는 매우 현명하고 온화한 사람이며 또 기도의 사람이었다. 1901년 CIM은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사무 총책임자로 임명했고, 1903년부터는 허드슨 테일러를 계승해 대표자가 되었다. 그는 격동기인 중국이 매우 혼란한 상황임에도 뛰어난 리더십으로 30년 이상 CIM을 이끌었고, 그가 퇴임할 때까지 선교사 1326명이 함께하였다. 호스트는 일본인들에게 감금되는 고초도 겪었지만, 1945년 그가 고령으로 중국을 떠나기까지 60년 이상을 계속 사역하였고, 1946년 런던에서 케임브리지 7인의 마지막 사역자로 하나님께 돌아갔다.
‘케임브리지 7인’의 선교사에 대한 존경과 다양한 평가는 그때로부터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특별히 학생 자원자의 선교 동원 필요성과 유효성 분야에서 특별한 모범과 그 가치를 높이 평가받았다.
세상의 관심으로 가득한 젊은 시절에 자신들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단하고 세상이 주는 성공과 풍요를 대신하여 외롭고 힘겨운 선교의 길을 택한 ‘케임브리지 7인’은 그 시대에도 본보기가 되었지만, 후대에도 학생 선교 동원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케임브리지 7인’은 학생 선교 운동의 상징으로, 그들로 말미암아 I.V.F(영국 기독 대학생들의 모임)와 I.V.C.F(미국 모임)를 결성했다. 또 1955년 그들의 선교 헌신 70주년 기념행사에서는 ‘해외로 나가 주님께 헌신할’ 새로운 케임브리지 70인을 주시기를 기도하였고, 실제로 그 세대에 70명에 가까운 이들이 해외로 나갔다.
위 글은 교회신문 <225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