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성진 목사의 선교史<18>] 최고의 선교 동원가, 존 모트(John R. Mott)

등록날짜 [ 2011-01-27 10:09:04 ]

YMCA 창립 멤버로 40년 이상 활동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 지도자

지난호까지 다루었던 케임브리지 7인이 19세기 영국의 자발적 학생 선교 운동의 상징적 인물이라면, 가장 효율적이고 큰 영향력으로 학생 선교 운동을 주도한 인물은 미국 선교사 존 모트다. 또 이러한 선교 동원을 통하여 19세기 말 선교가 전 세계적으로 확장하는 시기에 각 교단과 선교회를 중심으로 한 경쟁적 선교를 연합과 일치에 의한 협력 선교로 바꾼 지도자이기도 하다.

존 모트는 1865년 5월 뉴욕 주 남부에 거주한 감리교 가정에서 태어나 아이오와(Iowa) 주에서 성장하였다. 부유한 목재상의 아들로 태어난 존 모트는 믿음의 가정에서 자라다가 13세 때 부흥회에 참석, 예수를 영접하고 회심의 고백을 한다. 16세 때 감리교 전통 상부 아이오 대학(UIU)에 입학하였고, 다시 코넬 대학에 진학하여 정치학과 역사학을 전공한 그는 1886년 그곳에서 C.T 스터드의 형제인 J.K 스터드를 통해 케임브리지 7인의 선교에 관한 설교를 듣고 감동하여 삶의 최우선 순위를 하나님의 선교로 정한다.

존 모트는 사회적 지위와 부를 포기하고 해외 선교에 전적으로 헌신한 케임브리지 7인의 삶이 자신에게도 이루어지기를 소망하였고, 이를 위해 신약 성경을 연구하고 그리스도와 인격적 관계를 쌓는 일에도 힘썼다. 그리고 그해 헐몬 산에서 열린 기독학생 수련회에 코넬 대학 대표로 참석하는데, 이 집회는 D.L 무디를 강사로 전미 100대학에서 온 학생 250여 명을 대상으로 1개월간 열린 부흥회였다. 그 집회 마지막 날, 존 모트를 포함한 학생 100여 명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어느 곳이든 선교사로 가겠다”고 서약한다.

이 서약은 학생 선교 자원 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다양한 교파와 신앙 배경을 가진 기독학생들의 집합체인 이 학생 자원자 운동(The Student Volunteer Movement)은 ‘세계복음화는 우리 세대에’라는 구호를 실현하고자 미국과 캐나다 대학생들 사이에 선교적 도전을 확산하였다. 존 모트는 이 모임의 회장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며 모든 것의 유일한 구세주 되심’을 증거함으로써 더 많은 학생이 선교에 참여하게 하였다.

이 초교파 학생 선교 운동이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1895년에는 세계 기독 학생 운동(The World Student Christian Movement)을 창설하였고, 30세인 존 모트는 1895년부터 1897년까지 약 21개월 동안, 전 세계 24국 144대학을 방문하여 이 기독 학생 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 학생 운동은 국제적이며 초교파적 성격을 띤다. 또한 모든 국내 운동은 독립적이고 고유한 특성을 가지며 자치적일 것을 강조하면서도, 국제적 선교 진행에는 서로 협력하고 지지할 것을 의무화하였다.

존 모트가 주장한 선교의 정체성은 세계를 복음화 하는 일에 긴급성과 의무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그의 저서 『우리 세대에 복음화를 이루자』를 통해 “청년은 세계의 복음화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모든 민족이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어야 할 것이며, 모든 민족이 그리스도를 알아야 할 권리가 있고, 악의 세력들이 이 세대에 비기독교 세계를 삼키기 전에 우리가 이 세대에 복음화를 이루어야 한다. 우리 젊은이들이 그리스도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기를 자원하여 해외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또 우리가 가진 복음화의 책임은 절박한 것으로 이것을 타인에게 양도하는 것은 불가하며, 우리는 우리 세대에 세계 복음화를 위하여 죽든지, 살든지 해야 할 것이다”라고 역설했다.

1910년에 열린 에든버러 선교대회(Edinburgh Missionary Conference)는 선교 연합을 위한 존 모트의 큰 업적이다. 이 회의는 10일간 대표 1355명이 참석한 최초의 초교파적, 국제적인 선교사 연합 회의였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교회 연합 운동(Ecumenical Movement)의 모체이다. 비록 현재 에큐메니컬 운동이 존 모트의 의도와는 다르게 진행되었다고 할지라도 선교의 일치와 연합을 위한 그의 수고를 깎아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윌슨 미국 대통령은 능력 있는 친구 존 모트를 중국 대사로 임명하고자 하였으나, 세계 복음화를 위해 자신의 부와 명예를 포기한 존 모트는 이를 거절하고, 오직 선교에만 힘썼다. 그는 YMCA 창립 멤버로 40년 넘게 활동하면서 그중 16년을 총무로 사역하기도 하였는데, 이 또한 선교를 전 세계적으로 연대하려는 방안이었을 뿐이다.

사실상 그는 선교사로 사역한 경험은 전혀 없음에도 생애 50년 이상을 선교와 학생 복음화 사역 최전선을 지키며 젊은이들이 선교지로 자원해 가도록 이끌었다. 그의 이러한 선교 동원을 통해 ‘세계 젊은이들의 아버지요, 개신교의 대변인’이라 불릴 만큼 큰 영향력을 끼친 존 모트의 수고는 노년에까지 이어졌고 교회 연합을 위한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설립에도 참여하였다. 20세기 기독교 지도자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1946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그는 “나에게 죽음이란 차를 바꿔 타는 정거장일 뿐”라고 한 고백했다. 1955년 1월 31일 마침내 그 긴 여행의 마지막 차를 바꿔 타고 떠났다.

위 글은 교회신문 <22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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