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1-04-06 09:28:08 ]
연세대학교 전신 ‘경신학교 대학부’ 설립 등
우리나라 선교-교육-의료에 지대한 영향 끼쳐
언더우드는 고아원 운영과 함께 제중원(濟衆院)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면서 복음전도에 힘썼다. 1887년 9월 27일 정동에 있는 자기 집 사랑방에서 조선 신자 14명과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이들 대부분은 이미 만주에서 존 로스(John Ross) 목사에게 복음을 듣고 믿은 전도자 서상륜에게 전도받아 신자가 된 사람이었다. 아직 목사가 없던 시기에 외국인 목사와 초기 조선 신자가 만나 세운 첫 교회가 바로 새문안교회다.
조선 실정을 파악하고 언어로 복음 전도하는 일에 자신감이 생긴 언더우드는 1887년부터 3차에 걸쳐 조선 북부 전도여행을 실행한다. 1차 전도여행은 1887년 개성, 소래, 평양, 의주 등으로 갔다. 언더우드는 조선 사람이 자신을 대하는 것이 이전보다 친절하고, 가는 곳마다 잠자리와 음식을 대접하는 모습에 힘을 얻어 식사와 모임 때 복음을 전하려고 힘썼다.
2차 전도여행은 1888년 4월부터 아펜젤러와 동행해 평양까지 갔다가 조선 정부의 ‘전도와 종교 의식 금지령’에 따라 선교부와 미국 공사가 소환해 돌아온 시기다. 이 칙령으로 많은 선교사가 몸을 사렸지만, 언더우드는 교육 현장에서 더욱 전도에 힘썼다.
3차 전도여행은 1889년 봄에 여의사 호르톤(Lillian Horton)과 결혼한 날 신혼여행을 겸하여 출발한 것으로, 언더우드는 말을 타고 부인은 가마를 타고 개성, 소래, 평양, 의주, 강계, 압록강 주변 마을을 방문했다. 이 전도 여행 기간에 언더우드 부부는 환자 약 600여 명을 치료하였고, 많은 사람에게 성경과 여러 기독 서적을 판매하였으며, 여러 지원자 중 32명을 데리고 압록강 건너 만주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
이외에도 언더우드는 각처에 수많은 교회를 세우는 일과 그들을 지원하는 일에 선교 전략을 세우고, 다양한 방법으로 선교를 담당했다.
문서선교는 언더우드가 조선 입국 초기부터 힘을 기울인 것으로, 그는 한국에 오는 선교사들에게 한국어 교본이 필요하다고 여겨 1889년 ‘한국어 회화 입문’이라는 회화 교재를, 1890년에는 ‘한글 자전’이라는 한영-영한사전을 간행했다.
또 이미 1887년 2월 7일에 ‘성서번역위원회’를 구성했고, 1889년에는 기독교서회 전신인 ‘조선야소교서회’를 조직하여 1890년 여러 선교사와 함께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번역했다.
언더우드는 양반계급이 아닌 일반 대중이 이해하는 성서 번역에 생의 마지막까지 온 힘을 기울였다. 또 독자적으로 찬송가를 편찬하는 일과 ‘그리스도 신문’을 발간하여 복음의 진리와 선교회 목적 그리고 농업과 과학에 필요한 내용을 알리는 일에도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언더우드는 서울에 기독교 대학을 세우는 일에 소원을 두고, 여러 교단 선교사들을 설득하고, 미국 방문 기간에는 한국 교육기금 모금도 추진했다.
그가 소원하던 기독교 대학 설립은 결국 1915년 3월 5일 미국 북장로교, 감리교, 캐나다 장로교 등 각 선교부와 연합해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학생 60명을 모아 ‘경신학교 대학부’를 설립해 뜻을 이루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이 학교는 1917년에 연희전문학교로, 1957년 1월 세브란스 의과대학과 연합해 연세대학교로 개명했다.
언더우드가 조선에서 한 선교 특징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네비우스 선교원칙’이다. 이는 초창기 여러 젊은 선교사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고 조언하고자 1890년 6월에 초청한 네비우스(John Nevius) 선교사가 제안한 선교 방법론으로, 현지 교회 자립, 자치, 자전을 목적으로 진행한 구체적인 선교 방안들이다. 이후 장로교단은 1893년에 합의해 ‘네비우스 원칙’에 입각한 선교 정책을 계속해서 채택했다.
언더우드가 한 또 다른 선교 특징은 다른 선교사들과 연합사역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 회중교회에 출석했고, 화란 개혁 신학교를 졸업하였음에도 장로교단 선교사로 파송받은 그의 신앙 경험들로 말미암아 그에게는 자기 교단만을 고집하는 성향보다는 초교파적 연합으로 선교하는 일에 큰 거부감이 없었다. 따라서 성서 번역과 같은 중대한 사역을 진행할 때 미국 남장로교, 감리교, 호주 빅토리아 선교회, 캐나다 장로교 등 다른 교파와 협력해 일을 추진했다.
또 선교 지역 중복으로 교파 간에 충돌이 발생하자 선교지를 분할하자는 파격적인 제안도 했는데, 그의 지역 분할 선교정책은 선교사 간의 불필요한 마찰과 재정낭비를 줄인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평가지만, 이 정책이 30년 이상 지속하면서 이후 한국교회에 교파주의와 지방색을 가속했다는 부작용과 비판도 가져왔다.
그럼에도, 언더우드는 이 땅의 선교에 가장 많이 수고하였으며, 개화기 조선 사회변혁에도 크게 공헌한 사람이다. 그는 쉼 없는 구령의 열정으로 여러 지역을 순회 전도했고, 교육과 의학으로, 성서번역과 문서선교로, 교회 개척 선교전략과 연합, 역할분담 등으로 이 땅의 사람들에게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도 바친 사람이다.
31년 동안 조선 선교에 힘쓰던 언더우드는 극도로 쇠약해진 몸으로 귀국했고, 1916년 10월 12일, 57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가 조선 땅에 행한 선교사역은 이 땅의 수많은 사람의 가슴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236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