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1-03-23 17:24:12 ]
학교 세워 도산 안창호, 김규식 선생 등 한국 지도자 다수 배출
세계 선교사에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성공적인 선교가 이루어졌으며, 이제는 다른 민족을 선교하려고 힘쓰는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어떻게 복음을 받아들였는지와 선교사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9세기 말, 아직 어둠 속에 머물던 이 땅에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복음의 은혜가 임하였다.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아침, 제물포로 들어오는 배에는 낯선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할 사명에 불타는 26세 청년 목회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부부가 타고 있었고, 이들의 조선 상륙은 위대한 선교사역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조선 선교 개척자로 일컫는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는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아버지 존(John Underwood)과 어머니 엘리자베스(Elisabeth Grant Marie) 슬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부친 존은 문구류와 인쇄용품을 만드는 사람으로 신앙 안에서 자녀 교육에 힘쓰던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언더우드가 5세 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새어머니 밑에서 자란 언더우드는 13세 때에 부친이 하던 사업이 어려워지자 미국으로 이민했고, 언더우드 일가는 뉴 더햄(New Durham)에 정착한다.
언더우드는 헤스브룩 소년학교(Hasbrook Seminary for Boys)에서 수학하는 동안, 그로브 교회 목사인 메이본 박사에게 개인지도를 받아 정규 고등학교 과정을 거치지 않고 뉴욕대학에 진학한다. 1881년 뉴욕대학을 졸업한 그는 뉴브런즈윅(New Brunswick) 시에 있는 화란 개혁 신학교(The Dutch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해 신학적 깊이와 함께 전도 열정을 키운다.
신학교 재학생이면서 1883년 여름부터 뉴저지 주 폼프톤(Pompton)에 있는 교회를 담당한 그는 1883년 10월 코네티컷 주 하트퍼드(Hartford)에서 열린 ‘미국 신학교 연맹대회’에 참가하고, 여기서 선교 소명을 확신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인도 선교를 목표로 두고 1년 정도 기초 의학을 공부한다. 척박한 외국 환경에서 선교하려면 복음전도와 함께 의료 혜택도 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884년 봄에 신학교를 졸업한 언더우드는 선교를 놓고 심한 갈등에 빠지는데, 이전까지 희망하던 인도보다 미지의 땅인 조선과 1300만 조선 사람에게 선교하라는 음성이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으로 가는 길은 쉽게 허락되지 않은 데다, 뉴욕 한 교회가 그를 담임목사로 청빙했기에 그의 갈등은 더욱 깊었다. 더 기다릴 수 없다는 생각에 청빙을 수락하려는 순간, “누구도 한국으로 가려 하지 않는다. 네가 한국에 가야하지 않겠느냐?”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음성을 들은 그는 다시 선교 본부를 찾았고, 마침내 1884년 7월 28일 북장로교 파송 조선선교사로 임명돼 선교를 확정한다.
언더우드는 그해 11월 목사 안수를 받고,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1월 25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하는데, 곧바로 조선 땅에 들어오지 못한 것은 갑신정변이 일어나 정세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에서 2개월 머무는 동안 아펜젤러를 만나 함께 조선 선교를 논의하고 또 조선인 신자 이수정을 만나 그에게 조선의 상황과 언어를 배운다. 또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서를 받아 조선으로 출발, 1885년 4월 5일 제물포에 도착한다.
언더우드는 비록 말은 서툴렀지만, 거리나 사랑방에서 사람들을 대면하면 성경을 꺼내 읽으면서 질문에 답하는 방식으로 전도에 힘썼다. 그러나 조선 사람들이 지닌 외국인 배타성을 넘어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파란 눈에 높은 코를 가진 외국인에 대한 선입견과 거부감 그리고 복음에 대한 오해가 큰 부분을 차지했다.
그럼에도, 언더우드는 자신이 해야 할 선교 일을 찾았고, 특히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는 일과 교육 사업에 관심을 두었다. 1886년 2월 14일 미국 공사관에 도움을 청해 조선 조정에 고아원 설립 신청서를 제출하고 허가를 받는데, 언더우드는 이곳을 단순히 고아나 극빈자 아동을 수용하는 보호기관이 아닌, 교육과 기술을 가르치는 일종의 기술학교 형태로 운영하고자 하였다. 또 장차 정규 교육기관이나 신학교로 발전하도록 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내우외환을 겪던 조선 정부로서는 종교 활동이 아니라 고아와 극빈자 자녀를 돌보는 사회사업 형태를 띤 선교 사역에는 매우 호의적이었다. 1886년 5월 11일 정동에 한옥을 사들여 수리하고 정식으로 문을 연 고아원은 조선인이 원장을 맡았으나, 언더우드가 실제적 관리와 교육을 담당했다.
주로 한문과 영어 그리고 성경을 가르친 이 기관은 실제로 4년 후 학교 체제와 기구를 갖추고 구세학당(救世學堂)으로 개명한다. 이 학교의 교육목적은 조선인들에게 기독교적 진리를 가르치는 전도사와 교사를 양성하는 것과 졸업생을 배출해 나라의 일군으로 세우는 것이었다.
이 학교 출신으로는 교육자며 독립운동가로 초대 정부 입법위 의장을 역임한 김규식 선생, 도산 안창호 선생 등이 유명하다. <다음 호에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3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