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1-04-20 10:03:27 ]
교육으로 독립운동가 길러내고 전국 돌며 전도에도 매진
젊은 나이에 부르심받았지만 그 자녀까지 한국에서 선교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는 185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州) 서더튼에서 태어났다. 아펜젤러는 어릴 때부터 철저한 성서 교육과 경건주의 신앙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럼에도, 그의 실제적인 회심은 18세 때인 1876년 10월 6일, ‘웨스터 체스트교회’에서 풀턴이 한 설교를 통해서 일어난다.
1882년 프랭클린-마셜 대학을 졸업 후 두류(Drew) 신학교에 진학한 아펜젤러는 요한 웨슬리 부흥운동에 매료되고 또 세계 선교에 관심을 둔다.
아펜젤러는 처음에 일본을 선교지로 삼으려 했으나, 조선으로 선교를 떠나려던 친구가 사정상 갈 수 없게 되자 대신 조선 선교사로 지원하는데, 이 소식에 그의 가족들은 모두 반대했다. 특히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선교지에서 익사하는 꿈을 꾸었다며 극심히 반대했다. 하지만 주님께 자신을 완전히 드리기로 작정한 그의 선교 열정은 아무도 막을 수가 없었다.
아펜젤러는 신학교 졸업 직전에 선교 현장으로 나아갈 동반자인 다지(Ella J. Dodge)와 결혼하고, 마침내 목사 안수와 선교사 파송을 받아 1885년 2월 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 2월 27일 요코하마에 도착한다.
아펜젤러 부부는 선배인 맥클레이 선교사 집에 한 달을 머물던 중, 먼저 와 있던 언더우드(H. G. Underwood)를 만나서 그와 함께 조선 상륙을 준비하여, 마침내 조선인 신자 이수정이 출간한 ‘마가복음’ 한글 번역본을 가지고 부산을 거쳐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제물포로 들어온다.
아펜젤러가 선교 사역으로 처음 시작한 것은 교육이다. 그 이유는 1884년 조선을 방문한 맥클레이 선교사가 고종 황제에게 허락받은 선교 사업이 직접적 포교가 아닌, 교육과 의료에 한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아펜젤러는 정동에 주택을 구매.수리하여 신교육을 할 학교를 세웠다. 1885년 8월에 학생 4명으로 시작한 이 학교는 1887년 고종에게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이름을 받아 영어와 과학, 문학 등을 가르친 조선 근대교육의 효시(嚆矢)가 되었다.
조선 정부가 교육.의료 선교만을 허락했기에 처음에는 이 일에만 전념하였으나, 아펜젤러는 기독교 복음 진리를 널리 전파하는 것이 선교사의 주된 임무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1887년 4월 13일부터 5월 7일까지와 1888년 4월, 2차례 북쪽 지방으로 전도여행을 떠나 평양까지 다녀왔다.
8월에는 존스(G. H. Jones) 선교사와 15일간 원주·대구·부산으로 전도답사를, 또 10월과 11월에는 해주를, 1889년 2월에는 공주(公州)를, 8월에는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전도여행을 다녀왔다. 이 시기 조선 팔도(八道) 중 육도(六道)에 다니면서 전도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 전념해 조선 입국 당시 90kg이 넘던 체중이 5년 후에는 60kg으로 줄어든 것으로도 그가 얼마나 선교에 힘을 쏟았는지 알게 한다.
조선 입국 초기부터 외국인 연합교회 목사로, 또 일본 공사관 직원들의 성경 교사로 사역하던 아펜젤러는 1887년 10월 배재학당 옆 한옥에 조선인 4명과 모여 첫 예배를 드리고 그 교회를 ‘벧엘’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훗날 정동제일교회가 된다.
이곳 정동제일교회에서 서재필, 이승만, 윤치호, 주시경, 이상재, 남궁억 등이 중심이 돼 ‘독립협회’를 결성하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기도 한다. 그러나 1898년 수구파가 모략하여 독립협회가 해체하고 주동자들을 투옥하자, 독립협회를 지원하던 아펜젤러는 감옥을 순회하며 구호와 전도활동을 하는데 이때 이승만, 이상재 등이 복음을 받아들인다.
문서 선교와 성서 번역은 아펜젤러가 감당한 선교분야 중에 큰 사역이었다. 그는 1888년 1월에 배재학당 교사로 입국한 올링거 목사와 배재학당 내에 ‘삼문(三文) 출판사’를 설립, 이곳에서 신문, 잡지 등 간행물을 발행하고, ‘한국성교서회(韓國聖敎書會)’를 창설해 여러 선교사와 함께 신약성서 번역에 열정을 쏟는다. 이러한 수고로 1900년까지 배재학당, 이화학당, 인천 영화학교 등 기독교 학교 교과서와 성경, 찬송가 등 약 25만 권을 인쇄.출판하는 놀라운 사역을 담당한다.
1902년 6월 11일, ‘성서번역회의’에 참석하려고 아펜젤러와 비서 조한규가 배로 목포로 가던 중에 일본 선박과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배가 침몰하기 시작하자 모두 탈출을 시도하는 그 순간, 조한규를 비롯한 몇 사람이 선실에 갇힌 것을 보고 그들을 구하려고 힘쓰던 아펜젤러는 안타깝게도 조선인 23명과 함께 깊은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그의 나이 44세. 조선 선교에 평생을 바치겠다는 거룩한 야망을 가지고 순교적 삶을 살던 아펜젤러는 17년간 사역을 끝으로 생을 마쳤다.
그러나 그는 ‘척박한 조선 땅에 심긴 한 알의 밀알’이 되었고,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고 방황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 조선의 선교사로 나아온 아펜젤러의 자녀는 모두 아버지처럼 이 땅 사람들을 위해 살다가 이 땅에 묻혔다. 큰딸 알리스 레베카 아펜젤러는 이화학당 교장으로, 아들 헨리 다지 아펜젤러는 배재학교 교장으로 일하였고, 양화진 선교사 묘소에 묻혔다.
위 글은 교회신문 <23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