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1-05-19 09:40:10 ]
다른 교단이 진출하지 않은 지역에서 복음 전도
한국에서 45년 사역하고, 함경도 원산에서 소천
펜윅 선교사의 선교 전략적 강점은 현지인과 함께하는 토착화와 자립 선교 방안이다. 당시 선교사 대다수가 파송한 선교부에서 후원을 받아 학교를 세우거나 병원을 짓는 데 주력할 때, 펜윅은 자립 선교 방안으로 자신이 경험한 서양 농업을 조선인들에게 가르치고, 당시 원산 시장(市長)인 윤치호와 함께 ‘원산 농장’을 운영했다. 또 이곳에서 재배한 농산물을 판매하여 그 수익금으로 개척한 250개 교회, 200여 목회자 사역비로 지원함으로써 현지 조달 선교 방법을 제시했다.
펜윅의 선교방법이 여러 선교사에게 알려지자, 1900년에는 감리교 여선교사로 개성 호수돈 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하인즈(Fanny Hinds)’ 양이 찾아온다. 그녀는 펜윅의 설교와 그의 헌신적인 선교정신에 감복하여, 평생 함께 선교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두 사람은 결혼한다.
함경도 원산에 본부를 두고 선교에 힘쓰던 펜윅은 1901년 재정난으로 조선에서 철수하는 ‘엘라 씽 기념 선교회’의 충남 공주-강경 지역 선교기반을 인수하고, 자신의 ‘조선 순회선교회’와 병합하여 조직을 확대한다. 또 1905년 공주에, 1907년에는 원산에 각각 성서학원을 설립하여 목회자 양성에 힘쓰는 한편, 현지 사역자인 신명균을 목사로 안수하여 원장에 임명하는데, 이것이 침례교단 첫 목사가 탄생한 것이다.
펜윅은 계속해서 자신이 훈련한 권서(문서 순회전도자)들을 각처에 파송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순회사역을 하는데, 그 결과로 각 지역에 31개 교회를 세우자, 이를 관리할 교단 조직 필요성에 직면한다. 이에 1906년 10월 6일, 충남 강경에서 동역자들과 교인들을 소집하여 대회를 열고 ‘대한기독교회(The Church of Christ in Corea)’ 창설을 선포했다. 이들은 원산을 본부로 하여 각 직제와 46개조 회칙을 의결하고, 초대 감독으로 펜윅을 추대했다. 이것이 한국 침례교단의 시작이다.
‘대한기독교회’는 1906년 한태영 선교사를 북간도에 파송한 것을 시작으로, 1909년에는 시베리아 선교사로 최성업을, 1913년에 7명, 1920년에 20명, 1925년에 34명, 1934년에 36명을 타문화권 지역으로 파송한다.
이는 당시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선교지 분할협정을 맺고, 임의로 조선 팔도를 선교권역별로 나누자, ‘대한기독교회’는 다른 교단이 진출하지 않은 지역에서 개척 선교할 것을 목표로, 조선 전역의 오지(奧地)는 물론 만주, 간도, 시베리아, 몽골 지역으로까지 사역을 확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조선이 일제 식민통치를 받게 되자 1905년 총독부는 각 종단에 포교계를 제출하도록 하여 선교 활동을 통제한다. 이에 펜윅은 포교계 제출을 끝까지 거부하는데, 그로 말미암아 그의 사역은 일제의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일제가 ‘대한’이라는 교단 명칭이 합당치 않다고 개명을 강요하자, 펜윅은 1921년 ‘대한기독교회’를 ‘동아기독교회’로 개칭한다. 이는 동북아를 선교대상으로 삼고 복음화하겠다는 그의 선교 의지가 나타난 명칭이다.
성서 번역에도 관심을 둔 펜윅은 타 교단 선교사들과 번역 용어 문제로 갈등하다가, 독자적인 찬송과 성서번역을 시도하는데 이미 1899년부터 ‘복음찬미’라는 한글 찬송가를 발행하였고, 이후 계속해서 증보판을 발행한다. 그리고 성경을 하층민들에게도 공급하고자 개인 번역을 시도, 1919년에 ‘원산 번역’이라는 이름의 신약성경을 출판한다. 이 번역서는 토착 언어를 사용하여 성경 본문에서 좀 더 실용적으로 번역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14년 원산서 열린 ‘제9차 대화회’에서 펜윅은 9년간 역임한 감목직을 이종덕 목사에게 성공적으로 위임하지만, ‘동아기독교회’ 실제적인 운영과 영향력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지속하였다.
펜윅이 한 사역에는 몇 가지 문제도 나타났는데, 우선 타 교단 선교사들과 연합사역에 실패함으로써 교단이 고립한 점, 감목 이양 문제로 신명균 목사와 결별한 점, 세상 교육을 불신하여 교인들의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못하게 한 점 등은 그의 고집과 임박한 종말에 대한 조급함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럼에도 조선 사람과 문화를 존중하고 서민이 사는 초가집에 기거하며 한복을 즐겨 입고 김치를 좋아하는 토착형 선교사로, 펜윅의 선교 열정과 헌신, 강직한 신앙과 오지 선교의 개척정신, 자립 선교 모델은 이미 시대를 앞선 것이다.
1935년 12월 6일, 펜윅은 72세를 일기로 이 땅에서 45년간 사역을 마감하고, 함경도 원산에서 소천 하는데, 유서에 “내 무덤은 봉분하지 말라. 무덤이 높으면 사람들에게 교만하게 보일 수 있으니 평토장해 줄 것”을 부탁할 만큼 자신보다 남을 더 생각하고 사랑하며 섬긴 선교사다.
위 글은 교회신문 <241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