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1-06-15 09:25:10 ]
어머니는 여성 교육에 매진… ‘이화학당’창설
아들은 병원과 교회 지어 진료하며 복음 전해
19세기 초, 인도와 아프리카 지역이 선교 부흥을 맞이한 것에 비교하면 극동아시아 국가들은 서양 세력과 서양 종교에 철저히 배타적으로 맞섰다. 이는 자신들이 가진 역사와 전통에 대한 긍지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작은 나라 조선은 선교사 입국이 더욱 늦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인접 국가에서 사역하던 여러 선교사와 선구적 인물들 때문에 점차 복음을 수용할 준비를 하였다.
이수정의 조선 선교 요청으로 미국 감리회와 북장로회는 1884년부터 선교사 파송을 준비하였다. 감리회 해외선교부는 일본에 파송한 맥클레이 선교사를 조선에 보내 국왕을 알현하게 하여 의료와 교육 선교를 허락받고, 북장로회는 중국에 파송한 의료선교사 알렌(H.N. Allen)을 조선으로 보내 그해 9월 미 공사관 의사 신분으로 입국하게 한다.
미국 오하이오 주 태생인 알렌은 의과대학을 마치고 중국 선교사로 지원하였다. 그러나 8개월간 상해와 남경에 머물며 사역하였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자 조선에서 외교 고문으로 일하던 묄렌도르프 주선으로 조선에 입국한다.
공사관 의료 담당자로서 선교 기회를 찾던 알렌은 12월에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크게 상처 입은 민영익을 치료한 것을 계기로 왕실과 조정 관료들의 신뢰를 얻어, 병원 설립을 허가받아 광혜원(훗날 제중원)을 개설하여 많은 선교사가 사역할 터전을 마련한다.
1985년 미국 북장로회는 이미 입국한 알렌을 의료선교사로, 언더우드를 교육선교사로 파송한다. 감리회 선교부도 의료선교사로 스크랜턴(W.B. Scranton)을, 교육선교사로 아펜젤러와 메리 스크랜턴(M.F. Scranton)을 각각 선발하여 파송한다.
이중 메리 스크랜턴 여사는 52세 때에 미국 감리회 여선교부 파송으로 뉴욕 의과대학을 졸업한 아들 스크랜턴 부부와 함께 입국하였다. 메리 스크랜턴은 남편과 사별한 뒤 감리회 여선교회 서기로 일하던 중, 조선에 여자 학교 설립이 필요하다는 정책에 따라 아들과 함께 선교사로 지원하였다. 사실 그녀가 적지 않은 나이에도 미지의 땅인 조선에 선교사 지원을 한 것은 장티푸스에서 아들을 구해준 하나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에 온 스크랜턴 여사는 여학생을 모집하고 가르쳤는데, 당시 조선 사회 통념으로는 여자가 교육을 받는 것은 드문 일이었기에 사람들에게 동의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스크랜턴 여사는 여성이 인격적으로 존중받지 못하던 사회 속에서 여성 교육 필요성을 역설하며, 조선 근대 여성교육의 선구자 역할을 맡는다.
1886년 1명으로 시작한 최초 여성 학교인 ‘이화 학당’은 차츰 그 필요가 더해짐으로써 1889년에 26명, 1896년에는 50명으로 학생 수가 늘고, 교사 수와 과목 개설도 확대한다. 이 학교는 1904년 중등과정과 1908년 고등과정을 신설함으로써, 여성 초등교육부터 고등교육 전 과정을 갖춘 학교로 성장한다.
또 스크랜턴 여사는 여성 의료의 심각성을 인식하여 본국에 여성병원 설립 기금을 요청하고, 1887년부터는 이화학당에서 같은 교단 소속인 하워드(M.D. Howard)를 통해 여성 환자 진료를 시작한다. 명성 황후가 ‘보구여관(保救女館)’이라는 이름을 하사한 이 여성 의료 사역은 최초 여성병원을 설립하는 데까지 성장한다.
스크랜턴 여사는 여성 전도에 힘쓰고자 하였다. 그러나 여성 선교사가 무척 적었고, 또 다른 집 여인에게 접근하기 어려운 시대였다. 이에 그녀는 ‘전도 부인’이라는 제도를 만든다. 이것은 ‘조선 여인 전도는 조선 여인이 한다’는 것으로서, 스크랜턴 여사는 훈련받은 여성들을 선별하여 ‘전도 부인’으로 임명하고 이들을 통하여 여성 전도에 힘썼다.
여성을 독립적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도 복음에 불붙은 여인들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각 지역과 산골과 오지를 누비는 ‘전도 부인’들의 사역은 가히 폭발적이어서 이때부터 이미 조선 남자들의 복음 수용성을 넘어섰다.
아들인 윌리엄 스크랜턴은 1885년 9월부터 민간 의료기관으로 진료소를 열고, 고종의 호의로 정식 병원을 설립하는데, 이것이 시병원(施病院)이다. 스크랜턴은 버림받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의료 혜택을 주고 복음으로 설득하겠다는 생각에서 도성 밖 각 길목인 남대문 상동과 서대문 애오개 그리고 동대문에 각각 진료소를 개설했다.
시병원(施病院)이 개원 후 4년간 치료한 환자가 무려 12,200명이 넘어설 정도로 가난한 백성에게 의료 선교로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스크랜턴은 ‘병원은 곧 교회’라는 선교 전략으로, 치료와 함께 전도를 병행하였으며, 약국을 개설하여 약과 더불어 쪽 복음도 같이 팔았다.
또 주일에는 집회를 열어 직원들과 새신자 예배를 드려 교회의 초석을 놓았다. 이것이 바로 상동교회, 아현교회, 동대문교회의 시작이다. 이들 교회는 구한말 가난한 백성을 향한 복음의 출구였으며 이준, 이동녕, 전덕기 등 항일 운동을 담당한 인재들의 산실이기도 했다.
선교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배타당할 때마다 “내가 하는 일이 이 땅 사람들 마음에 들든지 안 들든지 나는 이 땅의 사람들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며 큰 사랑을 보이던 스크랜턴 여사는 1909년, 25년간 사역을 마감하고 양화진 묘소에 고단한 육신을 뉘었다.
위 글은 교회신문 <245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