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1-08-16 13:20:19 ]
갖은 고난과 시련 이긴 피 값으로 현재 800만 기독교인 탄생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는 조선말 선교 시작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 후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 복음화를 위해 이 땅에 들어와서 일생을 바친 많은 선교사와 그들 가족의 흔적들로 가득하다.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 땅에 묻힌 외국인 선교사와 가족만 해도 143명이나 된다. 목숨을 바쳐 복음전파에 힘쓴 수고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선교사가 더 많기에 이 지면을 통해 단 몇 사람이라도 그들의 삶을 살펴보고자 한다.
■ 1892년 아내 로즈와 함께 조선에 온 미국 북장로회 소속 무어(S.F. Moore) 선교사는 14년간 한 열정적인 사역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데, 이는 그의 선교사역이 매우 독특한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무어는 우리나라 천민계층을 대표하는 백정을 대상으로 전도하면서,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백정의 신분 해방을 위해 힘쓴 선교사다.
무어는 조선 500년 신분 질서로 “백정으로 태어날 바에는 물에 빠져 죽는 게 낫다”는 참담한 실상을 보게 되었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장티푸스에 걸려 죽어가던 백정 박성춘을 고종 주치의 에비슨 선교사를 불러서 치료하게 한 일이 계기가 되어, 무어는 양반 출신 신자들의 반대에도 백정들을 주일 예배에 동참시킨다.
이는 세상은 신분을 나누어 차별하여도 복음과 하나님의 천국은 차별이 없기에, 차별당하던 백정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예수 사랑을 실천했던 것이다. 그리고 장티푸스가 극심하게 창궐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안전보다 환자들을 찾아 전도와 기도하는 일에 힘쓰던 무어 선교사는 그 역시도 장티푸스에 걸려 1906년 46세를 일기로 하나님께 부름을 받는다.
■ 캠벨(J.P. Campbell)은 1852년 미국 텍사스 출생으로, 남편 캠벨 목사와 결혼해 1남 1녀를 둔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녀의 나이 28세에 남편을, 얼마 후에는 어린 딸과 아들도 하늘나라로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을 당하였다. 모두 불행한 삶이라고 말할 때, 그녀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열정으로 고통과 절망을 이겨낸다. 그리고 일생을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삶을 살겠다는 결심으로 선교사로 나갈 것을 자원한다.
효과적으로 선교하고자 시카고 간호학교에서 간호학을 공부한 후, 1886년 중국 선교사로 파송된 캠벨은 상하이(上海)와 쑤저우(蘇州)에서 11년 동안 사역하다 1897년 조선에 입국하였다. 그녀는 여성을 위한 선교와 교육을 목적으로 배화학당을 열었고, 언어적인 제약에도 사역 초기부터 손짓, 발짓을 동원하여 가르치는 일에 힘을 쏟았다. 또 이곳에서 예배를 바탕으로 하여 훗날 ‘종교교회’와 ‘자교교회’를 설립하였고, 몇몇 전도부인들과 함께 이 땅 여성들을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사역에 20년 이상을 수고하였다.
캠벨은 1918년 안식년을 맞아 ‘자교교회’ 건축헌금을 모금하고자 미국을 방문하였다가 이듬해 병에 걸렸다. 다시 조선으로 건너가고자 하는 그녀를 여러 사람이 말리자, “나는 조선에 몸을 바쳤으니 죽어도 조선에 가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며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1920년 11월, 안식을 갈망하는 기쁨 속에 하나님 품에 안겼다.
■ 1890년 감리교 의료선교사로 파송된 로제타 홀의 가정은 대를 이어 이 땅의 의료선교에 큰 영향력을 끼친 분들이다. 로제타의 남편 제임스 홀은 평양에서 청일전쟁 부상군인들을 치료하던 중에 과로와 발진티푸스에 감염해 먼저 소천 하였고, 어린 딸도 풍토병으로 양화진에 묻혔다. 이러한 아픔에도 로제타는 43년간 의료선교와 함께, 여성 의료인력 양성과 점자법으로 시각장애인을 교육하는 일을 통한 복음 전파에 전념하였다. 또 한국에서 태어난 그녀의 아들 셔우드 홀도 부모의 뜻을 물려받아 결핵환자 치료와 크리스마스 씰 발행으로 결핵 퇴치운동에 큰 공헌을 하였다. 셔우드 홀 역시 1991년 소천하여 부모 옆에 묻혔다.
■ 이외에도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는 성공회 2대 주교로 선교 확장에 힘쓰고 또 YMCA를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지원한 옥스퍼드 출신 A.B 터너 선교사, 구한말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일제의 조선 침탈을 고발한 영국 언론인 출신 E.T 베델, YMCA 활동으로 이 땅 청년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심어주고자 힘쓴 미국인 F.M. 브로크만, 육영공원 교사와 배재학교 교장으로 또 옥중 전도로 민족지도자들과 함께하였던 D.A. 벙커 선교사, 이 땅의 어려운 시기에 고아들을 돌봤던 M. 위더슨 여사, 또 독립운동가 이상재의 전도로 신앙인이 되어 1921년부터 고아들을 천 명 이상 돌본 일본인 소다 가이치, 조선에 온 지 일 년도 못 되어 급성 맹장염으로 24세라는 꽃다운 나이에 사역을 마쳐야 했던 R. 켄드릭 여자 선교사 등. 이들 외에도 수많은 선교사와 그들의 자녀가 각종 질병과 위험 속에 살다가 제대로 된 치료도 한 번 받아보지 못한 채 이 땅에서 생을 마쳐야 했다.
125년 전, 이 땅에 첫발을 내딛은 선교사들이 목숨을 걸고 펼친 복음 전파 사역은 그 고난의 시간을 이긴 피 값으로 오늘날 이 땅에 800만이 넘는 기독교인들을 살게 하고, 5만 교회를 세우는 영광스런 열매를 맺었다.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이 땅에 바치리라” -R. 켄드릭 -
위 글은 교회신문 <25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