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성진 목사의 선교史<32>] 미전도 종족을 위한 선교 과업을 제시하다

등록날짜 [ 2011-09-27 13:53:48 ]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몇 개 국가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졌으며, 전도자들의 사역이 활발히 진행됐다. 이를 근거로 많은 선교단체가 이 시대의 선교적 사명이 어느 정도 완료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74년 제1차 로잔 세계 복음화 대회를 통하여 많은 선교사와 기관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풀러 신학교 랠프 윈터 교수가 ‘미전도종족(unreached people)과 미개척 선교지의 중요성’을 발표하여 이전부터 대두하던 ‘종족(people) 선교개념’을 선교 중심에 올려놓았다.

랠프 윈터는 언어, 문화, 사회 구조 등으로 구분하여 “한 국가 안에는 수십 혹은 수백 종족이 있어서 한 종족에게 복음을 전해도 다른 종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별개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을 제기한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국가’가 아닌 ‘종족’이 전도 대상이 돼야 하는 것을 역설하여 새로운 선교의 과업이 생겨났다.

‘20세기 선교학자며, 선교전략가 중 최고’라고 일컬어지는 랠프 윈터는 1924년 미국 LA에서 휴고 윈터와 헤이젤 부부 사이에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37년간 LA 고속도로 시스템을 개발하고 관리.감독하던 사람이었는데 부친의 영향으로 랠프 윈터도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 입학한다.

이후 콜롬비아 사범대학을 거쳐 코넬 대학에 진학하여 구조언어학을 전공으로, 문화인류학과 수학 통계를 부전공으로 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이 시기에 간호사로 일하던 로베르타 헬름(Roberta Helm)을 만나 결혼한 랠프 윈터는 프린스턴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에 장로교해외선교위원회를 통해 1956년 과테말라 산지 마야 인디언 부족 선교를 목적으로 선교지로 출발한다.

10년간 현지인 교회에서 사역하고 또 직업선교사로 파송된 지도자들을 돕던 중에 랠프 윈터는 선교 현장에서 수고하는 지도자들을 개발하는 방법으로 짐 에머리(Jim Emery)와 함께 신학연장교육(Theological Education by Extension) 방안을 창안한다.

그의 의도는 선교사들이 사역 현장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추가적인 신학 교육을 받아 신학 이론과 훈련에 부족함을 없애 선교 사역을 더 잘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랠프 윈터의 선교적 견해와 저술들은 도널드 맥가브란 박사의 주목을 받았고, 1965년 풀러 신학교에 ‘세계선교대학원과 교회성장연구원’이 설립된 후 랠프 윈터는 교수로 초청받는다.

풀러에서 가르치는 동안 랠프 윈터는 선교사 1000여 명을 만나서 다양한 선교 자료들을 얻는다. 또 맥가브란의 ‘종족선교 패러다임’을 지지하고 연구하여 미전도종족 파악과 선교 방안에 주력한다. 그 당시까지는 종족개념이 초보적이어서 기독교인이 20% 이내인 것을 종족이라 정하였다. 그러다 보니 미전도종족 파악 수도 450개에 불과했고 선교적 관심도 미비했다.

그러나 랠프 윈터는 각 지역 상황과 통계를 근거로 이미 전도한 종족과 자신들의 힘으로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할 수 없어서 누군가 언어와 문화 장벽을 뚫고 가서 전해야만 하는 미전도 종족을 구분하였다. 그가 발표한 바로는 전 세계에는 24000여 종족이 있고, 그 중 16000여 종족이 아직 복음화하지 못했다.

이를 근거로 랠프 윈터는 이제 기독교 선교에 남은 과업이 미전도종족 선교임을 천명했다. 1974년 로잔 대회 위원회는 이러한 미전도종족 선교 개념을 선교학적으로 타당하다고 인정하여 새로운 선교 과업으로 수용한다. 이후 1977년 로잔 전략회의, 1980년 파타야 회의를 거치면서 미전도종족에 대한 더욱 정확한 개념으로 현재 족속 내에 토착 교회가 없는 종족으로 정의하면서, 미전도종족 수는 12000여 종족, 인구 35억으로 좁혀진다.

랠프 윈터는 미전도종족 복음화 운동에 전념하려고 풀러 신학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1976년 미국 세계 선교센터(US Center for World Mission)를 설립한다. 윈터는 전방위 개척선교(frontier mission)를 소개하면서, US 센터에 미전도종족 복음화를 위해 사역하는 70여 개 선교단체를 영입하고, 모든 선교 정보와 전략을 공유하며,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협의하고, 각 족속 상황을 사실적으로 조사하게 함으로써 선교적 특성에 따른 복음화 전략을 수립해 진행하게 한다.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미전도종족 복음화를 위하여 한 교회가 한 종족을 입양하자는 소위 ‘종족입양운동’(Adopt-A-People, AAA)을 확산했다. 그리고 북미 최대 선교집회인 Urbana73에서 선교에 참여한 이들을 돕고자 ‘퍼스펙티브스’ 과정을 고안한 이후 현재까지 30년 이상 매년 각 국가와 지역에서 이 훈련을 지속하여 수많은 젊은 기독교인이 더욱 쉽고 체계적으로 선교를 배울 수 있고 책임 있는 선교사로 세워지는 일에 공헌했다.

또 그는 윌리엄 캐리 국제대학(William Carey International University)을 세워 22년간 선교 일꾼들을 세우는 일에 힘썼고, 윌리엄 캐리 출판사와 미국선교학회, 개척선교협회(Frontier Mission Fellowship)와 개척선교저널(International Journal of Frontier Missiology), 글로벌 기도다이제스트(Global Prayer Digest) 등을 차례로 설립하여 활동하여 선교 신학과 역사, 선교 문화 인류학을 바탕으로 지역별 선교 전략 수립과 인재 양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노년기에 골수암과 싸우는 투병 기간 중에도 거침없이 선교 현장을 누빈 그는 마지막까지 전시생활양식(wartime lifestyle)이라 불리는 검소함과 겸손한 삶의 자세로 남은 선교 과업인 ‘미전도 종족 복음화와 글로벌 선교네트워크 구축’을 위해 힘쓰다가 2009년 5월 20일 주님의 품에 안겼다. 

위 글은 교회신문 <25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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