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순교지 크루즈순례여행을 다녀와서] 죽음의 순간에도 당당했던 그 믿음을 본받아

등록날짜 [ 2016-06-08 09:35:24 ]

CBS 주관으로 3박 4일간 일본 크루즈여행 다녀와
일본 선교 역사 속에서 핀 순교자의 발자취 따라가




지난 5월 24일(화)부터 3박 4일 일정으로 크루즈를 이용한 일본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이번 크루즈 성지순례로 일본의 순교지 여러 곳을 둘러보면서 순교 정신을 새겨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전체 순교지 일정과 개요를, 다음 호부터는 순교지를 다녀온 이들의 소감과 선교 방향을 게재해 순교지에서 받은 은혜를 나눌 예정이다.
<편집자>



<사진설명> 크루즈 내 대연회홀에서 열린 부흥회

목회자와 성도 1800여 명을 태운 크루즈 코스타 빅토리아호는 5월 24일(화) 밤 11시경 부산항을 출발했다. 이날 저녁 7시 30분부터 대연회홀에서는 윤석전 목사 부흥회가 열렸다.

목회자와 성도들이 대연회홀을 가득 메운 가운데 윤석전 목사는 “이번 일본 순교지 순례에서 가장 중요시할 점은 어디에 순교 기념비가 있고, 어떤 사람이 순교했느냐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순교의 믿음을 내 안에 가지는 것”이라며 “주를 위해 목숨 바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값진 것이 없으니 신앙에 어떤  핍박과 좌절이 오더라도 굳건하게 믿음을 지켜 나갈 순교 정신을 우리 모두 갖고 돌아오자”고 주님의 심정으로 애절하게 설교했다.


<사진설명> 26인 순교기념비


■26인 순교자 기념비
다음 날 25일 아침, 일본 나가사키항에 도착했다. 바닷길을 밤새 달려 첫날 도착한 기항지는 일본 나가사키 현. 이곳에서 방문한 첫 순례 장소는 ‘26인 순교지’다.

언덕을 힘들게 올라가 처음으로 본 곳에는 26명이 하늘을 보며 올라가는 모양을 새긴 기념비가 있다. 그중에 12세, 13세, 14세 아이 3명도 포함되어 있다.

1597년 1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기독교 금지령을 선포한 가운데 스페인 선교사를 포함해 크리스천 24명이 체포됐다. 이들은 귀가 잘린 채 교토에서 출발해 한 달 동안 걸어 나가사키에 와서야 처형되었는데 놀랍게도 이들이 고통 중에도 주 예수를 찬양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고 그들을 따라오던 2명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밝혀 모두 26명이 십자가에 달려 창에 찔린 채 순교했다.

이날 윤석전 목사는 기념비 앞에서 성도들에게 26인 순교지에 관한 믿음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여기 이 자리에서 12세, 13세, 14세 아이들도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데 그냥 매달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뾰족한 쇠꼬챙이에 몸이 찔려 가면서 죽었어요. 얼마나 고통과 죽음의 공포가 대단했겠습니까. 예수를 모른다 하고, 안 믿겠다고 한마디만 말하면 그 자리에서 놓아줄 텐데 끝까지 예수를 부인하지 않고 죽어요. 죽을 때 뒤 순서 사람들이 앞 순서 사람에게 자기가 먼저 순교하면 안 되겠냐고 하면서 조금이라도 먼저 주님 계신 천국에 가려고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잘 생각해 봐야 합니다. 믿노라 하면서도 기분 나쁘면 기분 나쁜 표 다 내고, 성질나면 성질 다 부리고, 좋으면 좋다 하고 나쁘면 나쁘다 하면서 자기 기분대로 사는 사람은 절대 마지막 때 순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순교의 현장을 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왜 저렇게 죽을까. 예수를 부인하면 살 수 있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어느 순간에도 부인할 수 없는 나와 주님과 관계를 잘 정립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 위해서 죽으신 피의 공로를 생각하며 신앙에 절대 변덕 부리지 말고 순교의 믿음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사진설명> 스즈타 감옥 터


■스즈타 감옥 터
26인 순교지의 감동이 채 식기도 전에 스즈타 감옥 터, 일명 ‘미야자키 감옥’이라고도 부르는 순교지를 방문했다.  나가사키 현의 오무라 남쪽 작은 언덕에는 당시의 참상을 알 수 있는 흔적은 찾아볼 수는 없지만, 그 감옥 터 위에 흰색 3층 탑을 짓고 커다란 십자가를 세워놓아 지나가는 사람이 잘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대나무로 엮었다는 이 감옥은 약 20㎡(6평) 공간에 최대 33명이 갇히기도 했던 곳으로, 이 중 몇몇은 참수형이나 화형을 당했다.

그곳은 1613년 금교령이 내려진 후 1617년부터 1622년까지 외국인 선교사 30여 명을 비롯해 크리스천들을 가두었던 곳이다. 이 감옥은 도저히 인간을 가두는 감옥이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크리스천들을 참혹하게 고문하고 학대하던 곳이다. 당시 종신형을 선고받은 10세, 11세 형제는 60여 년 동안 이곳에 갇혀 있다가 74세, 75세로 숨을 거뒀다. 예수를 부인하기만 하면 당장 풀어준다는 회유의 말을 듣고도 그들은 그 긴 세월 동안 끝까지 주를 향한 믿음을 지키다가 죽음을 맞이하였다.


<사진설명> 호쿠바루 처형장에서 기도하는 성도들. 처자이별바위

■호쿠바루 처형장과 처자이별바위

오무라 영내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의 피가 흐른 곳이 바로 호쿠바루 처형장이다. 1657년 체포되어 참수형이 결정된 406명 가운데 131명이 1658년 7월 27일 호쿠바루 처형장에서 순교했다. 순교자들은 형장에 도착해 엄중한 조사를 받은 후 4열로 줄을 지어 무릎 꿇은 채 차례로 참수형을 당했는데, 현재 이곳에는 순교자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정면에는 전국 순교자를 기념하는 동판 릴리프가, 그리고 후면에는 오무라 영(領)의 박해(코오 리쿠즈례) 당시 순교자를 기념하는 동판 릴리프가 조각되어 있다.

이어서 이들 131명이 마지막으로 가족과 이별한 장소인 처자이별바위에 들렀다. 그때 너무나 많은 눈물을 흘려 지금도 바위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원래는 바위가 7개였으나, 태평양전쟁 후 현재 4개만 남아 있다.

1658년 7월 131명이 목 잘려 순교한 후, 일본인들은 이들 죽은 크리스천이 부활할 것을 두려워해 머리와 몸을 먼 곳에 따로 매장했는데 그곳에 세운 ‘머리 무덤 기념비’와 ‘몸 무덤 기념비’를 찾아 첫날 순교여행을 마쳤다.

첫날 순교 여행을 마친 목회자와 성도들은 그날 저녁에도 윤석전 목사가 인도하는 선상부흥회에 참석해 순교 정신을 가슴 깊이 새기는 은혜를 받았다. 이날 윤 목사는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리면 밖에 버리워 밟힐 뿐임을 명심하여, 이 땅에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이 그 맛을 잃지 않도록 경성하여 깨어 있어야 한다”고 전했다. 또 “순교지를 돌아보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들이 죽음 앞에서도 당당히 주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도 그 믿음을 꼭 가져서 죽음의 순간에 주님을 배신하지 않는 순교의 믿음을 소유하자”고 전하고 어떤 유혹과 핍박에도 굴복하지 말고 신앙생활에 전념할 것을 애절히 당부했다.


<사진설명> 야이자 공원과 순교기념비


■야이자 화형장
26일(목) 순례객 1800여 명은 카밀로 콘스탄치오 선교사가 화형된 야이자 언덕을 방문했다. 현재 이곳은 공원으로 조성돼 순교기념비가 서 있다. 강 건너편에 멀리 히라토 성이 보인다. 선교를 위해 순교당한 이와 목을 벤 이들을 한 번에 생각할 수 있는 곳이다.

이탈리아 출신인 카밀로 콘스탄치오 선교사는 1605년 일본에 들어와 선교 활동을 하던 중 1614년 도쿠가와 막부의 금교령에 의해 필리핀 마카오로 추방되었다. 그는 1621년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사가와 이키츠커에서 선교하던 중 체포되어 화형을 당했다. 그는 순교하기 직전 일본어, 포르투갈어, 네덜란드어로 설교했는데,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어 행복하고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전했다고 한다.

윤석전 목사는 이곳에서 “머나먼 타국에 와서 ‘선교하지 말고 자국으로 돌아가라’는 회유에도 끝까지 남아 선교하다가 화형당한 이가 얼마나 뜨거운 구령의 열정을 가졌을지 생각해 보라. 만약 내가 복음을 전하다가 그런 불에 타는 순간을 맞이한다면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라. 기왕에 우리가 여기 왔으니 순교자의 믿음을 가져야 한다. 과연 나는 그런 위대한 영광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을지 다시 한 번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자. 이것은 오직 성령 충만으로만 할 수 있으니 성령에 장악당하는 믿음을 소유하자”고 성도를 향해 간절히 전했다.


<사진설명> 마츠우라 사료 박물관에 보관된 기독교 선교 금서령


■마츠우라 사료 박물관
이어 마츠우라 사료 박물관을 방문했다. 이 박물관은 나가사키 현 히라도 시(市)에 있으며, 일본 외교무역을 가장 먼저 시작한 히라도 영주인 마츠우라 다카노부의 저택이었던 곳이다. 현재 마츠우라와 히라도의 역사에 관한 사료를 잘 보존하고 있다. 박물관 안에는 마츠우라의 물품과 금, 차 도구, 문서, 도서 등 다양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이곳 역사 자료 중에서 순교지 순례자로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1587년 6월 19일 발령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기독교 선교사 추방령 원본이다. 추방령의 본문은 “기독교의 선교를 금하고, 선교사들을 20일 이내에 일본에서 추방할 것. 그러나 남만선(포르투갈선)에 의한 무역은 계속해서 용인할 것. 기존 크리스천의 신앙은 유지해도 좋다”라는 내용으로 “선교는 금지하되 무역은 장려한다”는 목적이었다.

그 후,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앞서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예수의 복음 접하고 믿었지만 금교령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성도가 순교를 당했고 지금은 전체 인구 중 기독교인이 1%도 되지 않는다. 어떤 것이 진정한 복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히라도 자비에르 기념교회
일본의 선교사 역사는 1550년 8월 프란치스토 드 자비에르가 일본 히라도에 처음 방문한 것으로 시작한다. 히라도 영주였던 마츠우리 타카노부의 환대를 받고 영지 내 선교를 허락받았다. 자비에르가 이곳에 거주하는 동안 신자가 100여 명 생겼다.

그 당시 페르난데스라는 일본어를 조금 할 줄 아는 동역자의 도움으로 일본어로 번역한 책을 읽고 설교하여 많은 신도가 생긴 것이다. 그들의 기독교 역사는 1559년 불교 신자였던 남편에게 참수당한 마리아 오센의 순교와 1622년 일본인 최초의 신부인 세바스찬 기무라의 순교로 이어졌다. 이러한 순교에도 16세기 말에는 일본인 30만 명이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했다.

■그리스도인임을 구별하는 현장 퍼포먼스
순교 여행 마지막 일정에, 에도 시대에 기독교인을 구별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예수의 그림(일본어로 ‘후미에’)을 땅에 그려 그것을 밟는 자는 살려 주고, 밟지 않는 자는 죽여 버리는 현장을 재현하는 시간이 있었다.

과연 그 자리에서 우리는, 아니 나는 주님을 배반하지 않을 믿음을 보일 수 있었을까. 귀가 잘린 상태로 한 달 동안 엄청난 육체의 고통을 겪은 후에도 깔끔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좁은 감옥에서 60년이 넘도록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온갖 유혹에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가족과 형제, 주위 사람들의 손가락질에도 굳건하게 내 믿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나로 인해 아내와 자식이 고통을 당하고 때로는 같은 죽음을 맞이할 때도 꿋꿋하게 믿음으로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일본 순례지역을 돌아보면서 값지고 귀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 복음을 너무도 값어치 없게 취급하지는 않았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렇게 우리는 순교의 자리에서 “아멘 주 예수여, 내게 이런 기회를 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외칠 수 있는 믿음이 넘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정재형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48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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