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6-06-20 14:39:29 ]
지난 5월 24일(화)부터 3박 4일 일정으로 목회자와 성도 1800여 명이 CBS 주관으로 크루즈를 이용해 일본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이번 호에서는 일본 선교의 방향에 대해 알아보면서 순례여행의 마지막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
<사진설명> 예수의 그림(일본어로 ‘후미에’)을 땅에 놓고 밟는 자는 살려 주고, 밟지 않는 자는 죽여 버리는 현장을 재현하고 있다.
■포괄주의적 선교 방식의 효과
일본의 초기 선교는 다분히 포괄주의적 방식이다. ‘포괄주의’는 제한·금지하는 규정과 사항을 나열하고, 나머지는 원칙적으로 자유화하는 법칙을 말한다. 즉 일본 선교는 히라도 항을 통한 경제 무역이라는 바람을 타고 항해하는 식의 ‘포괄주의적 선교’를 펼쳤다. 성령 충만으로 선교한 것이 아닌데도 선교의 불씨는 아직도 꺼지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온다.
당시 포괄주의적 선교가 일본을 위한 복음의 불씨를 남기는 일에 기여했다는 점을 보아 선교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반면, 이는 대한민국 모슬렘화를 위한 모슬렘의 포괄주의적 선교 방식을 십분 주의해야 한다는 역사적 결론을 얻는다. 근래 할랄 식품 생산단지 조성은 모슬렘의 포괄주의적 선교 방식임을 인식해야 한다. 성도들은 주변 사람에게 모슬렘의 해악성을 자세히, 널리 알려 모슬렘의 포괄주의적 선교적 불씨가 대한민국에 자리잡지 않게 해야 한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한 것은 현재를 사는 우리 성도들에게 역사적 교훈을 주기 위함이 아닌가? 역사적 교훈을 잊는 민족은 멸망한다.
■야이자 화형장과 현재 일본 교회
일본 규슈의 히라도에 있는 ‘순교의 못 판’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주저하지 않고 예수를 따라 못 길을 갈 수 있을까’ 퍼포먼스를 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일본의 기독교인의 처형 방법 중 하나였던 화형(火刑)은 즉각적이면서도 더욱 고통이 커서 심리적으로 달아나고 싶은 마음, 두려움에 떠는 마음이 다른 형벌보다 더 강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고비 역시 천국에 대한 바른 희망을 가지고 있는 성도였기에 화형의 순간에도 순교를 마다하지 않았다.
현재 우리의 삶은 때로는 슬프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 모진 훈련이 지날수록 이 땅이 아닌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게 하고, 정금 같은 믿음에 근거한 인내의 믿음을 가지게 한다. 부르심을 입은 우리에게 오는 모든 환란은 마지막 최후 승리를 위한 훈련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일본 순교지 순례를 통해 본 한국교회의 과제
일본 문화청에서 발간한 『종교연감』에 따르면, 2009년 일본의 종교인 수는 신도(神道) 약 1억 843만 명, 불교 8750만 명, 기독교 237만 명, 기타 888만 명으로 추산했다. 2억여 명인 총인구 수를 상회하는 이러한 수치는 한 사람이 여러 종교를 믿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일본인은 교회에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신사(神社)에 데려가며, 장례는 불교식으로 치른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진설명> 몸 무덤(왼쪽)과 머리 무덤(오른쪽). 당시 일본인은 호쿠바루 처형장에서 참수당한 기독교인이 부활할 것을 두려워해 머리와 몸을 따로 매장했다.
이번 순교지 순례여행이 대한민국의 선교사(宣敎史)를 새롭게 다시 써 가야 할 사명을 갖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아니고는 순교도 무익하다. 성령의 역사하심은 순교자적 믿음을 가진 자들을 통해 여실히 나타난다. 한국교회의 본질적 회복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토착화 신학을 배경으로 기독교 교리를 가로막는 혼합주의적 세력과 야합하지 않도록, 또 반성경적 법이나 문화가 팽배하지 못하도록 복음의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한 지성적 각성이 행동과 함께 병행되어야 한다.
이 시대의 귀와 코가 베이는 일, 처자바위에서의 가족의 정을 뒤로하는 아픔, 화형장에서의 순교는 혼합주의의 산본인 신학교의 개혁을 위해 인정과 사정을 뛰어넘는 순교자적 행동으로 이루어야 할 최우선적 과제다. 이런 일을 감행할 힘도, 의지도 없는 자들이 순교할 수 있을까?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을 때 교단적 배도가 일어나지 않으라는 법은 없다.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살후2:3).
주님께서 교단적 배도에 의해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다.
성령의 역사만이 그 순교를 값지게 보전하는 방법이다. 혼합주의적 선교는 지양해야 한다. 그러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은 전해져야 한다. 아울러 교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야만 가능한 본질적 정체성을 보전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밖으로는 모슬렘의 포괄주의적 선교를 방어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하고, 안으로는 토착화 신학을 퇴출하고 그 위험성을 교육해야 할 사명이 있다.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순교의 정신으로만 가능함을 새삼 느낀다.
/이명재 목사(울산 대은교회)
위 글은 교회신문 <48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