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9시면 허 집사는 노량진의 가게로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선다. 궁동의 출퇴근길은 그의 소중한 전도의 일터다. 허 집사는 그와 지나치는 모든 사람에게 인사를 한다. 그가 노량진에서 궁동으로 이사를 온 지 1년의 세월동안, 토박이 마을 사람들에겐 사뭇 낯선 이 이방인이 날이면 날마다 밤낮으로 인사를 해대니 그들도 처음에는 뜨악한 표정을 감출 수 없다가 이제는 믿고 의지하는 ‘좋은 사람’이 된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그의 남다른 전도원칙 때문이다. 관계를 만들어서 신뢰를 쌓고 전도해라, 전도한 사람 정회원화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두 가지 원칙은 그가 주를 위해 사는 삶의 방식이다. 집만 궁동으로 이사를 한 후 오며가며 틈만 나면 인사를 통해 안면을 쌓은 덕분에 주민들과 서서히 사는 얘기, 가족 얘기 등을 나누는 친분관계로 발전하고, 허 집사는 적절한 시기마다 복음을 전했다.
이렇게 서로 유대감을 형성해 갈 때, 마을 통장의 말에서 그는 할 일을 찾았다. 매달 1일과 15일에는 마을 청소가 있는 날인데 산 아래쪽에 있는 마이크로는 주민들에게 잘 전달이 안 되서 마을 가운데로 옮겼으면 좋겠는데 비용이 든다는 얘기였다. 복음전도를 위해 좋은 기회라 여겨져 허 집사는 얼른 이 비용을 자기가 대겠다며 나섰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는 그인지라 통장과 마을 주민들은 매우 놀라워했다.
그리하여 궁동주민이 된 교인들과 토박이 주민들 간에 몰라서 미처 함께 하지 못했던 마을 청소나 교회 건축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불편에 대해 그를 통로로 하여 서서히 이해와 조정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마을의 사정을 돌아보며 복음을 전하니 주민들 대다수는 ‘대성전 완공하면 교회 나간다’는 약속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우리 교인이 된 사람들도 있다.
허인철 집사는 91년 연세중앙교회의 망원동 시절에 예수를 처음 만났다. 그때부터 뿌리 내리고 가지를 뻗으며 열매를 맺어온 것이 15년째. 그의 전도로 교회의 여기저기서 굵직하게 한 몫을 감당하며 신앙생활 하는 이가 20여명이다.
그러나 그의 전도여정에도 시련은 있었다. 98년경, 주일 저녁에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몇몇 기존 성도 때문에 자신이 전도해온 새신자가 곤란을 겪자, 그만 상처받고 격분한 것이다. 그 이후 3년 동안 상처와 불신으로 괴롭던 중에도, 청년 시절에 술과 우울증으로 외롭고 슬펐을 때 만나주시고 사랑해주신 예수님에 대한 감사와 그분을 만나게 해주신 담임 목사님에 대한 의리가 그를 붙들었다. 또한 자신의 전도로 꾸준히 신앙생활 잘 하고 있는 이들을 볼 때‘내가 이러면 안 된다’는 자각과 힘을 얻기도 했다.
결국 어느 삼일 예배 담임 목사님의 설교에서 자신이 스스로 성처 받을 만큼 믿음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의 믿음의 시야는 더 넓어지고, 낮은 자세로 영혼을 섬기고 사랑함은 더욱 성숙해졌다.
폐병을 고침받고 교회의 청년과 결혼하여 잘 살고 있는 J집사, 아기를 못 낳다가 교회 온 첫날 눈물로 은혜받고 임신한 자매는 그의 따뜻하고 지속적인 섬김의 열매이다. 불의의 사고로 불구가 된 것을 비관하던 한 청년이 은혜 받고 새 삶을 살자 시골에서 그의 부모님이 올라와 몇 번이고 고맙다는 절을 하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허집사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허 집사는 전도를 훈련시키는 체제가 있어야 한다고 재삼 강조한다. 교회와 연합회와 기관을 총망라한 전도조직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그는 신중하게 의견을 제기한다. 그에겐 전도한 수가 중요하지 않다. 끊임없이 쫓아다녀서 전도하고, 전도한 후에는 확실하게 신앙생활 할 때까지 관심과 사랑으로 섬겨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의 삶에서는 치열한 자신과의 싸움과 인내, 그리고 구주 예수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이 눈물로 점철되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바꾸셔서 영혼을 살리는 데 쓰시듯이 우리도 그렇게 변했으면 좋겠다.
위 글은 교회신문 <6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