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에게 가장 친근하게 느껴지는 국악이 무엇인지 물어본다면, 상당수가 ‘사물놀이’라고 대답하는 것에 그다지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아마도 사물놀이처럼 세계무대에 잘 알려진 우리 음악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사물놀이는 1978년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장단을 새롭게 재구성하여 한국에서 처음 선보인 획기적이고 독창적인 시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선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던 음악이었다. 당시 대학로의 한 소극장에서 초라하게 출발했던 사물놀이는 오히려 해외로부터 크게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현재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큰 무대에서 기립박수를 받으며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독특한 장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한국 안에서의 국악이, 국악찬양이 그리 자연스러워 보이진 않는다.
현재 한국에서 불리고 있는 찬양은 거의 90% 이상이 외국곡이거나 그 형식을 모델로 하여 만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각 나라별 자국의 전통적인 찬양 비율을 보면 인도 98%, 독일95%, 프랑스 76%, 아프리카 70%로 이들 국가의 찬양을 들어보면 상당히 독창적이면서도 그 나라의 고유한 음악적 정서를 느낄 수 있다.
근래의 국악찬양은 국악에 대해 극히 보수적이었던 초창기 교회에 비해 상당한 발전과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현재 한국국악선교단을 비롯한 크고 작은 규모의 국악선교단체 및 개인들이 국악찬양을 만들고 보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문제는 여전히 국악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과 오해들이 ‘음악’과 ‘국악’ 사이에 놓인 장벽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 비하면 국악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굿판에서 사용하던 부정한 악기들이라는 생각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 같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북이나 장구, 꽹과리, 징 등이 굿판이나 그 밖의 주술적인 의식에 사용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악기자체가 비기독교적이며 부정한 악기라는 증거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동안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악기가 예배시간에 설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국악’이라는 특별한 달란트를 묻어둔 채 사용하지 않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를 점차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국 기독교의 찬양은 초창기에 비하면 눈부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오고 있다. 요즈음은 기존의 찬양에 못지않은 세련된 작곡기법과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는 전문성을 갖춘 찬양과 찬양사역자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흐름이 ‘국악찬양’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못내 안타까운 현실이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찬양은 자기 민족의 언어와 조화를 이루는 음악 형식으로 만들어져야 하며, 자기 민족의 고유한 창법으로 불려져야한다”라고 말한다. 또한 시편 150편에서 “찬양 할 수 있는 모든 악기의 종류로 호흡이 있는 자는 찬양하라”고 기록되어있다.
문제는 찬양의 형식이나, 시대의 유행, 취향이 아니라 찬양이라는 그릇 안에 담는 내용이 중요한 것이다. 그 내용이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간절함으로 가득하다면, 찬양의 형식이나 그 외의 문제들은 그 다음의 문제가 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찬양이라는 그릇에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담아야 하는가의 문제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진정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찬양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기도하며 신령과 진정으로 준비한 찬양은 적어도 찬양을 위한 찬양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음악이나, 어떤 악기일지라도, 피부색이 서로 다른 인종일지라도 하나님을 찬양하기에 마땅한 것이다.
이제 ‘국악’은 과거의 모습으로부터 벗어나 한국 땅에서 한국인에 의해 한국인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도구로 새롭게 거듭나야 할 것이다. 또한 다른 모든 음악과 함께 어우러져 하나님 앞에 조화를 이루어 간다면, 하나님 귀에 더욱 아름다운 찬양으로 울려 퍼지게 될 것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109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