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한국사람 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 판소리 흥보가 중 한 대목인 “제비몰러 나간다~”,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라는 모 제약회사의 광고 카피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 한 편의 TV광고로 인해 박동진 명창은 당시 각종 매스컴에서 연예인 못지않은 유명세를 치뤘다.
박동진 명창은 1916년 충남 공주군에서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박동진의 아버지는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면서기라도 시켜보기 위해 대전의 중학교에 보낸다. 그러나 중학교 졸업을 불과 몇 달 앞두고 박동진 명창의 일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을 맞게 된다.
박동진 명창과 판소리의 운명적인 만남은 협률사(조선후기 예술단체)의 판소리 공연을 보게 되면서 시작된다. 당시 박동진 명창은 중학교 3학년으로 16세의 나이에 불과했지만 당대 최고의 스타인 이동백, 송만갑, 장판개, 이화중선, 김창룡 등의 명창들이 출현하는 공연을 본 후 깊은 감명을 받아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된다.
1933년, 18세가 되던 해 청년 박동진은 판소리를 배우겠다는 일념으로, 전국 각지의 내로라 하는 명창들을 찾아다니며 본격적인 판소리 공부에 전념하게 된다. 박동진 명창이 대중들의 특별한 사랑을 받게 된 것은 엄청난 수련으로 인한 탁월한 기교와 성음(聲音)의 소유자였다는 것 외에도, 그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박동진 특유의 익살과 재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동진 명창의 삶 가운데에 판소리보다 더 중요한 만남이 있었으니, 그것은 당시 초동교회의 조향록 목사와 동아방송 극작가인 주태익 씨가 예수의 탄생을 판소리로 해보자는 제의를 받게 되면서부터이다.
판소리와 예수의 만남
처음에는 “어찌 인류의 성인 중 한 분인 예수님을 창으로 부를 수 있나”하고 제의를 거절했으나, 결국 승낙하기에 이른다.
박동진 장로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간증하고 있다.
“집에 와서 대본을 읽는데 재미가 쏠쏠했다. 그 때까지 나는 예수가 미국 사람인 줄 알았는데 중동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왜냐하면 같은 동양권이라는 사실에 왠지 친근감이 더했다. 그러나 내 호기심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공자나 석가는 모두 자신을 위한 삶에 초첨을 두어 설파를 했는데, 예수는 전 세계 백성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왔다는 사실이 나를 자극했다. 아, 이 어른 정말 훌륭하구나. 높은 보좌를 버리고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왔구나 하는 감동이 물밀듯 밀려왔다. 이후 나는 골수 예수쟁이가 되었다.”
판소리 예수전은 총 3부로 되어 있다. 1부는 <구주 탄생>, 2부는 <갈릴리의 봄>, 3부는 <주님 고난과 부활>로 구성되어 있으며, 3부까지 완창을 하려면 총 7시간이 걸리는 대작(大作)으로 알려져 있다.
박동진 명창은 이 후에도 수많은 교회를 다니며 예수전을 통해 복음을 전하다가, 84세가 되던 해에 고향 공주에 내려와 판소리 전수관을 짓게 된다. 판소리를 통해 예수를 전하겠다는 소박한 꿈을 실현하기 위함이었다.
이 전수관의 가장 중요한 입학 조건은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것과 반드시 교회에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자로 살아온 박동진 장로는 이 전수관을 통해 생을 다하는 순간까지 하나님 일에 충성하다가, 2003년 7월 8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판소리와 예수의 만남’은 그렇게 성공적인 만남으로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예수와의 성공적인 만남이 판소리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을 통해 앞으로도 계속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위 글은 교회신문 <11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