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와 눈물로 쌓아간 교회의 역사
1885년 언더우드 목사와 아펜젤러 목사가 고종의 윤허를 얻어 정식으로 선교 사업을 시작한 지 불과 100년 만에 한국 기독교는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면서 세계 선교의 보루로 우뚝 솟고 있다. 가톨릭은 이보다 100년 정도 앞서 당시 정치적으로 소외되어 있던 실학자들에 의해 서양학문으로 연구되면서 자발적으로 수용되었다.
조선 가톨릭은 유교적 전통의 조상제사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극심한 박해를 받아 많은 순교자를 낳기도 했다. 기독교도 일제하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면서 주기철 목사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희생되기도 한다.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는 말처럼 기독교의 역사는 희생과 순교의 역사이기도 하다. 예루살렘의 초대교회가 시작된 이후 교회는 언제나 가혹한 박해와 탄압의 대상이었으며, 순교자들의 땀과 피와 눈물을 자양분으로 삼아 교회는 자라났고 최후에는 승리했다. 313년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신앙의 자유가 공인되면서 교회와 기독교 신앙은 모든 생활과 정신을 지배하는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지나친 교회의 권력화와 제정일치의 문화는 가톨릭의 타락을 가져왔고 1517년 마르틴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의 불이 붙는다. 이후 초대교회의 정신으로 돌아가려는 개신교 운동과 이를 억압하려는 가톨릭 사이에 피비린내나는 종교전쟁이 근 2세기 동안 유럽에서 계속된다. 특히 1618에서 1648년에 신교와 구교 간에 벌어진 30년 전쟁은 최대이자 최후의 국제적인 종교전쟁으로 기록되면서 많은 희생자를 가져온다. 전쟁의 주무대였던 독일은 당시 1천6백만 인구가 전쟁의 살육, 기근, 질병으로 말미암아 600만으로 줄어들기도 한다. 30년 전쟁을 종식시킨 베스트팔렌조약이 체결되고 로마가톨릭의 절대 권력이 무너지면서 신교의 신앙이 인정되었고, 현재 유럽의 근간이 되는 여러 주권국가의 정치공동체 모델이 형성된다.
유럽인을 지배하는 기독교 신앙
오늘날 유럽에서는 종교 간의 갈등이나 반목을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신앙이 많이 쇠퇴하면서 교회가 줄어들고, 젊은이들이 교회를 등지면서 교회가 고령화되는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근 1000년 넘게 지속하여 온 신앙의 정신과 습관은 여전히 유럽인들의 사고와 문화를 알게 모르게 지배하고 있다. 이 글은 유럽인들의 일상과 문화 속에 침투하고 있는 기독교 문화를 살펴보면서 기독교 역사와 관련된 유럽의 도시와 사건들을 소개하려고 한다. 언뜻 오늘의 유럽인들은 완전히 세속화되고, 기독교의 영향력도 줄어든 것 같지만 그들의 문화나 풍습에는 기독교 신앙에 기원을 둔 것이 아주 많다.
예컨대 우리의 명절이나 공휴일이 농사주기나 민간신앙과 연관된 것처럼 많은 유럽 나라의 명절과 기념일은 기독교의 명제에서 기원한 것이 많다. 영국의 부활절 연휴, 프랑스의 성신강림일, 독일의 그리스도 승천 대축제일 같은 기념일이 그것이다. 그리고 많은 나라의 상징물, 국가, 국화 등에도 기독교 신앙과 문화가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상징 동물은 닭으로 월드컵 때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이는 바로 베드로를 회개시킨 성경 속 닭의 역사에서 기원한다. 독일의 상징 동물은 독수리인데 이 역시 기독교 문화와 관계가 깊다. 영국의 국기인 유니온 잭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의 연합을 상징하는데 각국 기의 기본 형태는 십자가이다. 이외에도 결혼식, 장례식, 축제 등에 기독교 문화는 뿌리 깊게 배여 있다. 그들에게 기독교는 여전히 생활 일부이다.
순교자의 발자취를 따라
유럽을 여행할 때 이왕이면 기독교의 역사를 반추하고 생각할 수 있는 곳을 방문하는 것도 뜻깊을 것이다. 예컨대 칼뱅의 숨결이 깃든 스위스 제네바에는 길이 100미터, 높이 10미터의 종교개혁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유명박물관이나 역사적 건축물도 좋지만 기독교 역사와 사건의 현장을 방문하면서 선배들의 발자취와 순교의 열정을 되새겨보는 것도 의미 있는 여행이라 할 수 있다. 본 시리즈는 이러한 취지로 유럽 기독교의 역사와 사건들을 되새기면서 현재 유럽인들의 일상 속에 깃든 기독교 문화의 뿌리를 소개하고자 한다.
위 글은 교회신문 <121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