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일반적으로 크리스천 연예인이라고 하면 직업이 연예인이면서 기독교인 경우와 기독교 문화 활동만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말한다. 가수를 예를 든다면 직업이 가수이면서 기독교인이거나 기독교 음악만을 하는 CCM 가수들을 크리스천뮤지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주일 우리 교회에서는 크리스천 연예인들이 공연을 선보였다. 그들이 보여준 수준급의 음악연주와 무대매너, 대중을 압도하는 열정적인 모습에 많은 성도가 함께 공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모두 연예인이면서 기독교인들이었고, 그들이 전한 노래 속에 복음을 담고 있었기에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들의 음악장르 자체만을 가지고 따져본다면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과연 교회 음악에 합당한 거룩한 음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거룩한 기름부음과 정결함
그 동안 우리가 들어왔던 기독교 음악을 장르를 기준으로 따져보면, 비트가 강한 록 음악, 힙합, 성인가요 등 기독교 음악으로는 부적격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대중문화가 급속히 보편화하면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선이 사라지면서 기독교 음악도 모든 장르에 걸쳐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은 음악 장르만으로 교회 음악과 일반 대중음악, 즉 거룩한 음악과 그렇지 못한 음악을 구별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의 대중음악과 크리스천 음악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거룩한 기름 부음’과 ‘정결함’이다. 일반 대중음악과 같은 음악 장르일지라도 거룩한 기름 부음과 영적인 메시지가 입혀지고 연주자의 뜨거운 신앙고백이 함께 표현될 때, 그 음악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작품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장르를 놓고 이것이 ‘거룩하다, 거룩하지 않다’를 논의하는 것보다는 얼마나 정결하게 ‘기름부음’을 받았는가? 과연 그 가사 속에 담긴 영적인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평가하고, 그 음악을 하는 사람들의 영성이 어떠한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즉, 장르라는 음악의 구조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음악을 어떤 방향으로 누가 연주하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구조가 아닌 방향의 문제
좀 더 이 의미를 확장시킨다면 위의 음악의 예처럼 다양한 문화와 가치 속에서 나타나는 세상의 문화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에 대하여 ‘구조와 방향'을 구별해 낼 수 있어야 한다. 구조란 창조된 사물의 ‘본질’, 즉 하나님의 창조의 법에 의해 창조된 사물을 말한다. 그와 대조적으로 방향이란 범죄로 말미암아 그 구조적인 규례로부터 일탈하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어 그 구조적 규례에 다시 순응하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의 많은 일들은 하나님의 창조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타락의 결과로 하나님의 원래 창조 목적의 방향에서 빗나간 것이다. 즉, 죄의 본질은 하나님의 뜻의 방향에서 빗나간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회개’ 역시 죄로 말미암아 빗나간 방향의 궤도를 수정하고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그 방향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전쟁이 영적 전쟁이다. 그 전쟁의 양상은 영적이지만 전쟁이 벌어지는 곳은 창조 세계인 우리의 생활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우리의 삶과 이 세계에 대한 성경적인 안목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을 죄의 구조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를 벗어났다는 방향의 문제로 보고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들을 성(聖)과 속(俗)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로 분리하여 간단히 판단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가 완전하고 선하신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그 범위를 벗어난 빗나간 방향을 바로잡아주려는 개혁의 자세가 필요하다. ‘이것도 그리스도에 속하는가?’라고 질문하기보다 ‘이 분야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개혁과 성화를 가져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 방향의 가늠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어야 하며, 그와 더불어 그 방향의 최종지점이 그림자와 모형에 불과한 이 세상이 아닌 영혼의 때를 향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죄로 인해 뒤틀어진 세상을 사랑하거나 그 속에 속해서는 안 된다. 그 방향을 바로잡고자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으로 세상을 품어야 한다.
위 글은 교회신문 <12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