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바르톨로메오 학살사건과 낭트칙령①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 홍세화는 프랑스인의 정신을 톨레랑스, 즉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사상의 자유를 인정하는 관용정신으로 요약한 적 있다. 관용이란 소극적으로 상대의 가치관이나 신념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회 구성원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고, 차이를 포용하여 공동체를 이뤄나가려는 적극적인 화합의 정신을 말한다.
그런데 톨레랑스가 종교전쟁의 처참하고 잔혹한 살육의 경험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종교적 기원을 가진 용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올 여름 우리들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주고 이슬람 과격 테러집단의 위협 앞에 누구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인식을 심어준 아프칸 인질사태는 잘못된 종교적 신념과 이데올로기에 오염된 증오가 얼마나 끔찍한 비극을 가져올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주었다.
중세 유럽의 후반기는 바로 이와 같은 피의 보복과 학살이 되풀이 되던 어둠의 시대였다. 수십 년간 종파 간 싸움이 계속되고 탄압이 자행되면서 수많은 인명이 처참하게 희생되고 전 국토는 기근과 전염병으로 황폐화 되어 지옥처럼 변했다. 광란의 폭력에 의해 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졌으며, 그 피를 딛고 기독교는 조금씩 뿌리를 내리게 된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즉 신교를 신봉하는 새로운 시민 세력의 등장과 더불어 정치적 자유와 인권의 신장이 이루어졌으며 구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근대의 여명이 밝아오게 된다.
위그노의 등장과 종교전쟁
유럽 곳곳이 종교전쟁의 소용돌이에 몸살을 앓았지만 특별히 16세기 프랑스에서 진행된 위그노 전쟁과 그것의 종식을 선언한 낭트칙령은 역사적 중요성과 상징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위그노 전쟁이란 구교, 즉 가톨릭을 신봉하는 프랑스 국왕 및 이에 기생하는 귀족 계급과 신교를 신봉하는 위그노, 즉 개신교도들 간에 진행된 프랑스의 종교내전을 말한다. 원래 위그노(huguenot)란 계급적으로는 직업군인, 상인, 제조업자 등 새롭게 등장하는 시민이 중심이 된 프랑스의 신교도를 지칭하는 말이다.
동일한 성격의 집단이 바로 퓨리턴으로 불려지는 영국의 청교도로, 이들은 후에 종교적 탄압을 피해 신대륙으로 건너가 미국 건설의 주역이 되기도 한다. 위그노와 청교도는 모두 구체제와 귀족계급의 특권을 폐지하고, 오랜 권력화와 형식주의에 물들어 타락한 로마가톨릭의 개혁을 주장하면서 시민의 정치적 자유와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는 새로운 시대를 염원한다는 공통성이 있었다.
하지만 로마가톨릭의 몰락과 새로운 민족국가의 대두가 곧 자신들의 정치적 몰락으로 이어지는 구체제의 특권계급은 종교개혁의 불씨를 폭력으로 짓밟고자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야만적인 학살과 고문이 자행된다. 물론 종교 전쟁은 일방적 탄압이 아니라 신구 쌍방 간의 충돌과 보복을 통해 양측 모두의 피해로 확산되면서 전 유럽으로 확산된다.
성 바르톨로메오 대학살
당시 프랑스의 가장 큰 귀족 가문이었으며 가톨릭 세력을 이끌었던 기즈가(Les Guise)의 기즈 공작이 1562년 예배를 보던 신교들을 습격하고 학살하면서 시작된 위그노 전쟁은 이후 8차례나 지속되면서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대학살에서 절정에 달한다. 이사벨 아자니가 주연한 ‘여왕마고’를 통해 잘 알려진 당시 학살의 이야기는 평화와 기쁨의 잔치를 순식간에 배신의 칼로 뒤엎으면서 하룻밤에 6000여 명이 살육되는 전대미문의 학살로 역사에 기록된다. 애초 신교와 구교의 화해를 도모하고 기나긴 종교전쟁을 종식시킨다는 미명 하에 신교 대표인 나바르 공국의 앙리 왕과 구교 대표인 프랑스 왕가의 마르그리트 공주의 정략적 결혼이 추진되었으나 결국 이 잔치는 피의 향연으로 변질되고 만다.
종교적 열정이 충만한 학살자들은 신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악덕을 자행하는 악마 자체였다. 여왕 마고의 한 장면에는 사도신경을 강제로 외우게 하면서 칼로 목을 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총을 들고 지하드(성전)를 외치는 이슬람 전사가 오버랩 되는 것이 우연은 아니다. 성 바르톨로메오 대학살 때 정치적 이유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앙리 왕자는 나중에 프랑스의 국왕이 되면서 신교의 신앙을 인정하는 낭트칙령을 발표한다.
위 글은 교회신문 <125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