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생활에서 가장 흔하게 일어나는 세계관의 충돌이 바로 창조론과 진화론이다. 진화론은 ‘과학’이라는 이유로 학문으로서 대우를 받았지만 창조론은 종교적 주장으로 취급되어 학교에서도 창조론은 가르치지 않는다. 과연 진화론은 과학이라 할 수 있을까?
무모한 발상에서 시작된 진화론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했던 시기는 그동안 종교가 주장했던 천동설과 같은 것들이 사실이 아님이 증명되면서 서서히 종교와 과학의 관계가 금이 가고 있었고, 진화론은 그 관계를 완전히 붕괴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다윈의 진화론은 비둘기 교배에서 시작되었다. 다양한 교배결과, 여러 모양의 깃털과 꼬리를 가진 변종들이 나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다윈은 자신이 확인한 변화의 예를 머나먼 과거로까지 무제한 확대시켰다. ‘이 산비둘기가 사육사의 손에 의해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그렇게 많은 변화를 일으킨다면, 자연 속에서 수천, 수백만 년 동안에는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을까? 시간이 충분하다면 변화는 거의 무한할 것이며, 비둘기는 전혀 다른 종류의 새이었을 수도 있다’라고 상상한 것이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어류가 양서류가 되고, 양서류가 파충류로, 파충류가 포유류로 변할 수 있다고이론을 확대했다.
진화론은 탄생부터 상상이 만들어낸 추론일 뿐이다. 다윈이 시도한 다양한 변화라고 하는 ‘교배’는 마치 카드를 섞는 것처럼 이미 존재하는 유전자들을 섞고 재결합하는 것이다. 아무리 카드를 이리저리 섞어도 새로운 카드가 생겨나지 않는 것처럼 교배는 새로운 유전자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유전자를 뒤섞어 만든 사소한 변화가 무한히 변화한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다윈 이후로 지금까지 다윈의 추론을 증명하지 못했다. 모든 생물들을 “각기 종류대로” 존재하게 하셨다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과학적으로 더 확실히 증명될 뿐이었다.
다윈이 드러낸 한계
그의 이론에 따른다면 물고기도 진화하여 허파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러면 물고기는 죽는다. 이와 같이 모든 생물은 어떤 부분이 하나씩 단편적으로 진화할 수 없는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irreducible complexity)’을 가지고 있다. 마치 조립되지 않은 쥐덫의 각자 부품으로 쥐를 잡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쥐를 잡으려면 모든 부품이 처음부터 조립되어 있어야 한다.
또 하나의 예가 인간의 ‘눈’이다. 눈의 각 구조는 한 가지만 이상이 생겨도 눈의 구실을 전혀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이러한 복잡성은 세포단위부터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음을 현대과학은 밝혀내고 있다. 다윈이 “수없이 많은 변화에 의해 생겨날 수 없는 복잡한 기관이 존재한다면, 나의 이론은 완전히 무너지게 될 것이다”라는 호언장담이 사실대로 된 것이다.
진화론은 자연주의라는 종교이다
다윈의 이론대로 한다면 컴퓨터 앞에 원숭이들을 앉히고 무수한 시간을 준다면 원숭이가 언젠가는 셰익스피어 작품을 타자칠 수 있다라고 믿는 것과 같다. 실제로 영국에서 이 실험을 해보았다고 한다. 원숭이 여섯 마리를 컴퓨터와 함께 가두어 놓고 관찰한 것이다. 원숭이들은 주로 돌로 때리거나 화장실로 사용하기도 했고, 몇 마리가 모여 키를 누르기도 했는데 S자를 가장 많이 쳤고 그 외 네 개 정도의 철자가 나왔다고 한다. 한 달이 지나도록 원숭이들은 인간의 언어에 속한 단어 비슷한 것도 쳐내지 못했다고 한다. 21세기 다윈의 추종자들은 여전히 이 실험에 기대를 걸고 있다.
지금까지 진화론이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유는 그 속에 숨어 있는 철저한 ‘자연주의', 즉 ‘생명의 기원’과 발달이 오직 자연적 원인들’이라는 사상 때문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하나님의 창조를 대적하려는 과학으로 포장된 또 하나의 세계관이며 종교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12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