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바르톨로메오 학살사건과 낭트칙령②
낭트칙령은 사실 정치적으로는 대단히 불완전하고 허약한 선언이었다. 프랑스의 국왕이 신교의 종교적 자유와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보장했으나 여전히 가톨릭이 국교임을 전제하였으며, 신앙의 자유에 대한 제약도 많았다. 낭트칙령은 신, 구교 양쪽의 불만을 초래했으며, 그나마 앙리 4세 사후 루이 14세에 와서 전면 폐기된다. 낭트칙령이 무효가 되면서 다시 신변의 위협을 느낀 신교도들이 대거 프랑스를 떠나게 되고, 이후 프랑스는 가톨릭의 유력한 수호국가로 남게 되지만 대신 유능한 인재들을 잃게 되고 대혁명의 파국으로 치닫는다.
정치적, 법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낭트칙령은 당시 종교적 명분을 내걸고 자행된 온갖 폭력을 종식하고 양심에 기초한 신앙을 인정하려는 톨레랑의 필요성을 선포한 첫 발걸음이라 할 수 있다. 낭트칙령은 시대적 한계상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으나 시민혁명과 오랜 내란을 거친 후에 관용의 문화로 프랑스인들의 의식 속에 온전히 자리잡게 된다.
중세 교회의 타락과 악행
사실 중세는 가톨릭이 전일적으로 정치와 문화를 지배하였으나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야만적인 고문과 살육이 자행되던 피의 시대였다.
중세의 악명 높은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이 바로 그 증거이다. 지금도 이탈리아의 산 마리노의 ‘고문박물관’이나 독일의 로텐부르크의 ‘범죄박물관’에 가보면 당시 사용되던 온갖 섬뜩한 고문기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가톨릭의 가르침에 범하는 행동을 하거나 이교도로 의심을 받게 되면 무조건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다 죽는데 성경의 가르침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임을 생각할 때 정말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철학자 월 듀란트는 역사적 한계를 고려하더라도 종교재판이야말로 인류사에 가장 암울한 오점으로 남는다고 비판하였다.
마녀사냥에 의해서 희생당한 사람도 50만 이상을 헤아리는데 일단 마녀로 지목되면 어떤 경우에도 빠져나갈 수가 없었으며, 다른 마녀를 고발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할 때까지 고통스러운 고문이 계속됐다. 마녀를 입증하는 방법 중 한 예로 사지를 결박하여 물에 빠뜨려 물에서 떠오르면 마녀로 간주하여 처형하고, 떠오르지 않고 익사하면 무죄(?)로 간주하는 어처구니없는 심판도 있었다.
신교에 대한 탄압에서도 이런 잔인성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종교 전쟁이 이렇듯 잔인하게 전개된 것은 종교적 명분을 내세우며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와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들의 현실적 이해관계가 크게 작용했지만 교회와 성직자들이 이들과 부화뇌동한 탓도 크다. 당시 로마 가톨릭은 교회가 제정한 외적 규범과 제도화된 형식에 신앙을 맞추면서 세력을 유지하고 이것에 대한 비판을 이단으로 정죄하면서 성경의 본래 정신을 벗어난다. 마치 종교적 열심을 내세우면서 로마와 결탁하여 예수를 죽이고자 했던 예수 당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과 똑같다고 할 수 있다.
낭트와 낭트칙령의 교훈
종교개혁은 가톨릭의 이러한 그릇된 세속화와 타락을 비판하면서 초대교회의 순결한 정신과 오직 믿음을 통한 구원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회복하려 한 신앙 혁명이었다. 앙리 4세가 낭트에서 신교를 인정하는 칙령을 반포한 것은 낭트가 속한 지방인 브르타뉴의 역사를 생각할 때 의미가 크다. 대서양과 영불해협에 면한 브르타뉴 지방은 원래 5세기경 영국에서 건너온 켈트족이 세운 나라로 근 천 년 이상 자치를 누리다가 1491년 프랑스에 편입된 지역이다. 정치적으로는 늘 보수적이었지만 항구가 발달해서 외부의 변화에도 민감했고 그로 인해 전쟁의 포화가 끊이지 않던 곳이 바로 브르타뉴였으며, 그 수도가 바로 낭트였다.
앙리 4세는 낭트 성에서 1598년 역사적인 낭트칙령을 선포하면서 화합을 호소했다. 앙리 4세 자신이 바로 성 바르톨로메오의 대학살을 몸소 목격하고 거기에서 살아남았기에 무익한 종교전쟁을 끝내고 톨레랑스의 시대를 열어나갈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위그노전쟁과 낭트칙령은 신앙의 자유가 얼마나 많은 환란과 시련 속에서 성취되었는지를 새삼 가르쳐 준다. 또한, 세상의 단맛에 취한 교회는 쉽게 악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이 종교전쟁의 교훈이기도 하다.
위 글은 교회신문 <13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