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산책] 우리문학이야기(3)

등록날짜 [ 2008-07-01 15:50:15 ]

윤동주는 한국문학사에서 역사이면서 전설로 존재한다. 그가 태어나서 자란 북간도, 문학도로서 공부했던 서울의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 도쿄의 릿쿄(入敎)대학,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 그리고 정체불명의 주사를 맞으며 마루타로 죽어갔던 규슈 후쿠오카 형무소 등은 문학사를 뛰어넘어 대한민국 근대사의 중요한 사건으로 자리 잡고 있다.
윤동주는 파평윤씨(坡平尹氏) 보령공파(保寧公派) 20대손으로 태어났다. 윤동주의 조부인 윤하현이 기독교에 입교하여 가문의 첫 장로가 되면서 윤동주는 3대째 예수 믿는 모태신자 종손으로 출생하게 된다.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은 환갑이 넘은 나이에 평양 장로교 신학교(현 장로회신학대)에 입학하여 목사가 되었다. 윤동주 가계의 이러한 신앙적 배경은 그가 한민족 최초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을 형상화한 기독교 신앙시인이 되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민족의 피난처가 된 예수
윤동주가 태어나서 자란 북간도 명동촌은 당시 기독교와 신학문, 그리고 항일 민족교육운동의 중심지였다. 명동촌이 복음화된 것은 당시 서울 상동교회(현 서울 중구 남창동 소재) 청년학관 출신인 정재면 교사의 영향이 컸다. 그는 학생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는 전제조건으로 성경수업과 기독교 예배를 내세웠고 신학문에 대한 교육열로 가득 찼던 유학전통의 명동촌은 드디어 마을 전체가 기독교에 입교하기에 이른다. 온 마을이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명동촌은 청·일, 두 나라의 횡포를 피해 기독교에 심신을 의지할 수 있었다.
윤동주가 다녔던 명동소학교의 교가는 지금의 찬송가 79장 〈피난처 있으니〉이다.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 오라/ 괴롬이 심하고 환난이 극하나 피난처 있으니 여호와요”라는 가사를 영국 국가에 맞추어 부른 이 교가를 통해 역사의 질곡 속에서 북간도의 우리 민족이 하나님을 정신적 피난처로 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윤동주가 22세에 쓴 〈슬픈 족속〉이란 시에서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라고 묘사한 “흰 수건 검은 머리에 두른 이들”이 바로 외세의 억압 속에서 예수를 피난처 삼은 한민족이었던 것이다.

겨레의 별로 부활한 순교자의 시
윤동주는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가 운영하던 북간도 용정의 은진중학교에 다니면서 그의 생애와 문학을 예견하는 시 한 편을 썼는데, 그 시가 바로 〈초 한 대〉이다. 그의 나이 18세에 쓴 이 시에서 윤동주는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나의 방에 풍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이때부터 자신을 민족제단에 바칠 희생제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앙심을 바탕으로 한 그의 민족애는 그가 25세에 썼던 〈십자가〉란 시에서 절정의 시어로 표출된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인류의 죄를 십자가에서 대신 감당해야 했기에 괴로웠지만, 그렇기에 인류를 구원할 수 있어서 행복했던 예수의 삶을 윤동주는 재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한국문학에 예수의 피묻은 십자가를 세우고 자신이 순교자가 되어서라도 절망에 처한 민족을 구원하고자 했던 것이다.
예언 같은 시를 쓰고 윤동주는 29세의 젊은 나이에 일본제국주의의 희생양이 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소천했다. 옥중에서도 《신약성서》를 읽으며 예수를 의지하던 그는 그토록 염원했던 조국광복을 불과 6개월 앞두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별 헤는 밤〉에서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라고 소망했던 윤동주는 그의 마지막 시 〈봄〉에서 “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흘러/ 삼동(三冬)을 참아 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며 자신의 부활을 노래하고 있다. 순교자가 되기를 바랐던 그가 부활의 소망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께서 자신과 민족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음을 의심치 않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예언처럼, 윤동주란 이름과 그의 시는 온 겨레를 비추는 민족의 별로 마침내 부활한 것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13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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